“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왠지 지금은 없을 것 같아요.”
“왜 없다고 생각하죠? 제가 인기가 없어 보여요?”
“아니요. 인기는 많을 것 같아요. 안락사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 당연히 결혼은 안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라면 지금보다는 활기가 있어 보였을 테고요.”
“제가 활기가 없어 보여요?”
“말하는 모습은 그렇지 않은데 말하는 내용이 그래요. 삶이 재미가 없고 안락사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까. 회사를 막 그만둬서 그런지 겉으로는 홀가분하고 신나 보이기는 합니다.”
기우는 실눈으로 형서를 보면서 동의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여자친구는 없어요. 그런데 만나고 있는 여자는 있어요.”
이번에는 형서가 실눈을 뜨고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낸다. “만나고 있는 여자는 뭐죠?”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가끔 데이트하는 그런 관계인 거죠.”
“사귀는 사이는 아닌데 잠자리는 갖는 그런 관계를 말하는 건가요?”
기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잠자리만 갖는 건 아니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한다. “가끔 영화를 보기도 해요.”
“그렇게 만난 지 얼마나 됐어요?”
기우는 눈을 왼쪽으로 치켜 뜬 채 잠시 생각한다. “아마.. 한 2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나쁘네요.”
“제가 나쁜가요?”
“그런 관계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려면 분명 둘 중에 한 명은 좋아해야만 가능할 텐데요. 아마 여자분이 좋아해서 그럴 가능성이 높을 걸요. 얼마나 마음이 고생이 심하겠어요.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밖에 만날 수 없으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정말 신기합니다. 그 마음을 거두면 되는데, 거두는 게 맞는데 그게 자신의 의지로 안 되잖아요. 그런 마음의 속성을 둘 중 한 명이 이용하고 있는 거고요. 반드시 한 명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게임입니다.”
기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저만 나쁜 게 아니라 상대도 나빠요.”
“어째서요?”
“상대방은 남자친구가 있거든요.”
“그래요? 혹시 그 분 남자친구가 얼마 전에 생겼어요?”
“아마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긴 시간 짝사랑하다가 지친 나머지 자기 좋다는 남자랑 사귈 수도 있죠. 남자친구 사귄 지 그리 오래 돼지 않았으니까 아직 마음이 완전히 이동하지 않았을 테고요.”
형서의 말에 기우는 크게 놀랐다. “대단한데요. 남자친구 생긴지 얼마 안 됐다는 걸 바로 알아채고 말이에요.”
“사실은 몰랐어요.”
“몰랐다고요? 방금 맞췄잖아요.”
“만난 지 2년 정도 됐다고 하니 짝사랑하기에 지칠 만한 시간이어서 최근에 생긴 게 아닌지 물어본 거였습니다.”
“맞춘 거나 다름없는 것 같은데요.”
“설사 맞췄다고 해도 그게 알고 있었던 건 아니죠. 정황을 고려해서 추정해보았을 뿐인데 우연히 맞았을 뿐이에요. 보지도 못한 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저는 몰랐습니다.”
기우는 그녀의 몰랐다는 말이 묘하게 인상적이다. 주변에 자신이 모르는 사실을 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녀의 말이 맞다. 맞춘 것과 알고 있었던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시험 문제의 답을 맞추듯 누군가의 삶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를 토대로 누군가의 삶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 알고 있었다,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건 아는 게 아니라 안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믿음에 빠지면, 그리고 그 믿음이 지속될 경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점 우매한 사람이 되어가기 마련이다.
“멋있어요.”
“뭐가요?”
“몰랐다고 하는 말이요.”
“별게 다 멋있네요.”
“모르는 걸 안다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거든요. 누구나 그런 생각에 빠질 수도 있죠. 저도 늘 그런 함정에 빠져요.”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다. “그러면 형서 씨는 남자친구 있어요?”
“없어요. 지금은 남자친구 사귈 마음이 전혀 없어요.”
“왜요?”
“작년에 6개월 정도 만나 남자가 있었어요. 그놈한테 데이트 폭력을 당했습니다. 그 때의 충격 때문에 새로운 이성을 사귈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아, 그런 일을 겪었구나. 어떻게 하다가 그런 나쁜 놈을 만났어요?”
“예전에 일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그놈이 몇 달을 적극적으로 저에게 호감을 표시했어요. 그러다가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나 보니까 집착이 있고 소유욕이 강한 편이더라고요. 감정기복도 심해서 별거 아닌 거에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놈에게 그런 면이 부담스럽고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관계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제 말을 받아들여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두 달 정도 지나니 다시 집착이 시작됐고 오히려 갈수록 그런 증상이 더 심해졌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이별을 통보했어요. 그랬더니 몹시 당황해 하면서 자신은 헤어지기 싫다고 하더라고요.”
“이별 통보했을 때 폭력을 쓴 거에요?”
“그때는 크게 화만 냈어요. 이별 통보한 후 며칠 뒤에 결혼하는 친구의 파티가 있었습니다. 축하기 위해서 친구 몇몇이 모였고 호텔 방을 잡고 밤새 놀기로 했어요. 그놈은 언제, 어디서 파티를 하는 지 알고 있었어요. 한창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그 놈이 저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거에요. 자신은 헤어지기 싫고 당장 얘기 좀 하자고요. 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고 우리 관계는 끝났다고 답장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전화가 계속 오더라고요. 당연히 안 받았죠. 그랬더니 다시 메시지로 나오지 않으면 찾아가서 파티를 망치겠다고 욕을 섞어서 협박을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무시했죠. 그런데 파티를 망치겠다고 반복해서 보내는 거 있죠. 급기야 호텔 앞에 와있다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정말 쳐들어올 기세였고 가만히 놓아두면 안되겠다 싶었어요. 저는 거기서 나왔고 그놈을 만났어요. 그 놈은 다시 만나기를 요구했고 저는 거부했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분을 참지 못하고 폭력을 쓰더라고요. 정말 무서웠어요. 그 덕분에 태어나서 경찰서도 처음 가봤습니다.” 형서의 목소리는 별다른 감정이 섞여 있지 않고 담담했다.
“진짜 쓰레기 같은 놈이네요. 듣는 내가 다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기우는 분노가 섞인 목소리 톤으로 말했지만 표정은 무덤덤했다.
형서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이 묘하게 어긋나 있음을 알아차렸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어서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과 실제 마음은 다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처음 알았어요.”
“무엇을요?”
“사람의 코에서 피가 그렇게 많이 나올 수 있다는 걸요.” 그날을 떠올리면 두려움이 몰려올 법도 한데 형서는 신기한 듯이 말한다. “맞아서 코피 나 본 적 없죠? 정말 생각보다 피가 엄청 많이 나오더라고요. 입 주위와 목 주변이 붉은 피로 물들었어요. 뱀파이어가 피를 빨아먹은 것처럼 말이에요. 코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어요.”
형서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머그컵이 테이블에 닿는 탁 하는 소리가 군더더기 없이 맑다. 미지근해진 커피는 더 쓰다. 기우는 폭력을 행사한 그녀의 과거 남자친구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폭력을 쓴다고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용인할 수 없는 부적절한 감정이 들 때가 누구나 있다. 대부분은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건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과는 빨리 끝내야죠. 그때 일을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거나 두려움이 상기될 법도 한데 굉장히 차분하게 말하네요. 마치 다른 사람이 겪었던 것처럼요.”
“지나간 일에 화내면 내 감정만 소비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남자친구를 사귈 마음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건 아마 제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두려움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안 좋은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저에게도 일어났을 뿐이죠. 안 좋은 과거에 갇혀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형서가 말한다. “저 어제 UFO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