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기우는 백화점 주변 거리를 무작정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걷다 보니 어느새 여의도 한강공원에 왔다. 한강공원을 목적지로 두고 걸은 건 아니었다. 사무실이 한강공원 바로 옆에 있지만 와본 기억이 별로 없다. 마지막으로 왔던 게 언제인가? 기억나지 않는다. 페인트칠이 빛바랜 나무 벤치에 앉았다. 시야가 훤히 뚫린 한강공원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하늘이 보인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이 약하게 분다. 바람에서는 후각이 예민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먼지 냄새가 난다. 새로 구입한 옷이 확실히 편하다. 타이트한 핏의 정장은 앉아 있을 때 허벅지와 엉덩이 부위가 조이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장을 입으면 목과 어깨는 언제나 단단하게 잠겨 있는 듯하다. 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을 때마다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넥타이를 맨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넥타이의 실용적인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미적인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있는 많은 넥타이를 모두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다. 세 개 정도 남겨두기로 한다. 넥타이를 매야만 하는 자리에 갈 수도 있으니까. 회사도 그만두고 정장도 벗어 던지니 감옥에서 탈출한 기분이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평소 같으면 지금도 업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자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퇴근 시간 전인데 불구하고 의외로 한강공원에 사람들이 많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숨을 헐떡이며 열심히 뛰기도 하고, 천천히 걷는 사람들도 있고, 기우처럼 벤치에 앉아있기도 하고,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있다. 제 각각의 방식으로 한강공원을 즐기고 있고 표정 하나하나에 여유로움이 비친다. 몸을 돌리기만 해도 방금 전까지 일했던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와 여기는 다른 세상이다. 햇빛이 유난히 쨍한 날이다. 반짝반짝 보석이 박힌 잔물결을 일으키며 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아무렇게나 먹다 남은 솜사탕 같은 작은 구름이 파란하늘 가운데 그려져 있다. 그 구름 아래에 양 옆으로 날개를 쫙 핀 갈매기 한 마리가 바람에 두둥실 떠있다. 덩그러니 서있는 나무 한 그루의 잎들은 작은 바람에 살며시 떨고 있다. 주인과 함께 총총걸음으로 지나가던 비숑 프리제가 멈추어 서서 기우를 쳐다본다. 기우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기우에게 다가오려고 하자 주인이 목줄을 살짝 당긴다. 비숑 프리제는 바로 방향을 틀어 총총걸음으로 가던 길을 간다.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좋을 것 같다. 눈 앞의 풍경은 마치 슬로모션 걸어놓은 화면처럼 느린 템포로 돌아간다. 여유로워 보이는 세상과 여유로운 마음이 동기화되어 기우는 일시적으로 뇌에서 일어나는 오류에 빠졌다. 세상이 느리다 못해 멈출 것만 같다. 생각도 멈추었다. 기우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다.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팔목에 시계가 없다. 평소에 늘 차던 시계를 오늘은 집에 두고 왔다. 실용성에 비해 비싸기만 한 시계이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기우는 시간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다니 신기한 일이다. 어떤 미지의 힘이 영상을 편집하듯이 일정 시간을 잘라낸 것처럼 시간이 빨리 갔다. 현서를 만나기 전에 요기라도 하려고 기우는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서 컵라면과 삼각김밥 두 개를 샀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밖으로 나왔다. 야외 테이블에 한 자리가 비어 있다. 그 자리에 앉아서 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다. 라면은 가끔 먹는 편이고 삼각김밥은 오랜만이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더 맛있다. 다 먹고 다시 편의점으로 가서 치약과 칫솔을 구매했다. 공중화장실에서 꼼꼼하게 양치를 하고 서둘러서 약속장소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