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2021년 4월 4일- 진서, 정인
큰 길로 나온 진서와 정인은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넷이 있다 둘만 있으니, 약간 어색하다. 신호가 바뀌고 건널목을 건넌다. 건널목을 건너자마자, 반포천을 건너는 다리를 건너간다. 걸으면서 같이 얘기를 하니, 어색함이 조금은 줄어든다. 두 사람은 느리게 걷고 있다. 길 하나 건너 왔을 뿐인데, 서래마을과는 다르게 인적이 드물고 조용하다. 얼마나 조용한지 가끔 부는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 두 사람의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이다. 걸어가고 있는 길은 가로등이 드문드문한 간격으로 서있어, 가로등에 가까이 가면 밝고 조금 멀어지면 어두워진다. 어두운 분위기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조금은 가려주는 것 같다. 둘 다 이 어색함이 싫지 않다. 오히려 정인은 이 어색함이 좋다. 진서는 이게 어색함인지 설렘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둘은 여전히 느리게 걷는다. 두 사람 앞으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간다. 길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니면 서로에게 집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두 사람 모두 날아가는 나비를 보지는 못했다. 정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옅은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는 달무리가 보인다.
달을 가리키며 정인이 말한다. “달무리 예쁘다.”
진서는 정인이 가리키는 곳을 본다. “와~ 진짜 그러네, 예쁘다. 이런 적 처음이야.”
“뭐가?”
“나 달무리가 예쁘다는 걸 오늘 처음 느껴봐.”
“정말?”
“응, 예전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봤어. 오늘은 엄청 예뻐 보인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럴 것 같은데, 아마 무심하게 볼 거야.”
“아니야, 나는 그런 거랑은 좀 달라.”
“어떻게 다른데?”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정리가 잘 안돼서.”
“정리? 뭐 그럼 다음에 정리되면 얘기해줘. 그런데 진서야, 언제부터 이 근처에 살았어?” 정인은 진서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조금 어색하다.
“1년 6개월정도 됐어.”
“혼자 살아?”
“응, 지금 혼자 살고 있어. 이혼하고 나서 구반포로 왔어. 너는 언제부터 이 동네에서 살았는데?”
진서가 갑자기 이혼 얘기를 꺼내서 정인이 조금 당황한다. “아.. 그렇구나. 나는 중학교 때까지는 신반포에 살았고 고등학교 때 여기 구반포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어. 지금은 부모님이랑 형이랑 다같이 살고 있고, 내년에 독립하려고 생각 중이야.”
“나도 중학교 때 신반포에 살았는데, 그래서 낯이 익은가 보다.”
“낯이 익다고? 아까는 나 모른다고 했잖아”
“응, 모르긴 모르지. 미안한 얘기지만, 네가 동네에서 인기가 엄청 많았다는 것도 오늘 미지랑 선아한테 처음 들었어. 진짜 나는 이때까지 뭐하고 살았는지 몰라. 어쨌든, 아까 너를 봤을 때, 처음 본 사람 같지는 않았어.”
“그럼 오다가다 봤나 보다. 같은 동네 살았고, 학교도 가까운데 다녔으니까. 아니면 혹시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어렸을 때 잠깐이라도 얘기는 해봤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미지랑 선아랑 서로 다 친구니까, 그런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
“그건 아니야. 우리가 단 1초라도 얘기를 했으면, 내가 기억을 못할 리가 없어.” 진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진서가 너무 단호하게 말해, 정인은 조금 당황했다. “단 1초라도?”
“응”
정인은 진서가 저렇게까지 확신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정말 오다가다, 우연히 몇 번 봤었나 보다.”
“아마 그럴 거야. 그래서 낯이 익나 봐.”
어느새 진서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나는 여기로 가야 해. 너는?”
“나는 저기 길 건너 있는 아파트에 살아.” 정인은 자신이 갈 길을 손으로 가리킨다.
“아 그렇구나. 오늘 반가웠어.” 진서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반가웠어. 그런데 저기..” 정인이 말을 하다가 머뭇거린다.
“그러니까 저기 혹시..” 정인은 또 말을 하다 말고 머뭇거린다.
진서는 눈을 크게 뜨고 정인을 쳐다본다. “혹시 뭐?”
“아까 보니까, 작품 만든 거에 관심이 많아 보이고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혹시 시간 될 때 작업실에 놀러 올래?”
예상하지도 못한 정인의 말에 진서가 놀란 듯 묻는다. “진짜? 그래도 돼?”
“그럼, 나야 언제든지 환영이지.”
“괜찮다면 꼭 한번 가보고 싶어. 나 백수여서 시간 엄청 많아, 너 시간 될 때 알려줘. 예술 작업은 어떻게 하는지 너무 궁금해.” 진서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백수?”
“응, 회사 그만두고 요새 놀고 있어.”
“아, 그렇구나. 얼마 전에 스튜디오를 옮겼거든. 전에 쓰던 데가 불편한 게 많아서, 작업하기 좋은 곳으로 옮겼어. 아직 정리가 좀 덜 되기는 했는데..”
“스튜디오 위치가 어딘데?”
“홍대 근처야.”
“아 홍대 근처구나.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약속 꼭 지켜야 해. 하하하.”
정인은 진서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진서와 정인은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진서는 집으로 가는 길에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어렸을 때 잠깐이라도 얘기는 나눠 봤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했던 정인의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진서 기억에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집에 오자마자 진서는 샤워를 한다. 씻고 나왔더니, 톡이 와있다. 확인해보니 정인이다.
『잘 들어갔어? 오늘 반가웠고, 스튜디오에 꼭 놀러 와. 늦었는데 잘 자고 ^^』
『나도 반가웠어. 당연히 가야지. 너무 가보고 싶어! 너도 잘 자~ ^^』
가슴이 두근거린다. 정인이한테 톡을 받아서 두근거리는 건지, 아니면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아서 그런 건지 헷갈린다. 오늘 처음 봤는데도 호감이 간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진서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고, 방 안은 어두워졌다. 정인과 함께 집까지 걸어오던 그 기분, 그 느낌이 아직 몸에 남아있다. 호감이라는 감정은 마음에 작은 신호 하나가 켜진 것인가 보다. 뇌에서 발전한 짜릿한 전기를 계속해서 심장으로 보내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으니, 두근거림이 손바닥까지 그대로 전달된다. ‘도대체, 이 느낌은 뭘까?’ 진서는 수면제 없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