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2021년 4월 21일- 진서, 정인
스튜디오에 갔다 온 이후로 진서와 정인은 매일 연락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주로 대화를 한다. 연락은 톡으로만 주고 받는다. 톡으로 얘기를 하다 보면 한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아직 전화로 통화를 한적은 한번도 없다. 진서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왠지 전화를 걸기가 망설여 진다. 정인도 진서에게 전화를 걸지는 않고 톡으로만 연락을 한다. 직접 전화를 거는 것이 왜 망설여지는지는 모르겠다. 전화로 직접 얘기를 한다는 것이 낯설 수도 있고, 정인과 아직 그만큼 가깝지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정인과 매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자체가 진서에게는 즐거운 사건이다. 정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설렘이 좋고, 정인한테 연락이 오면 기쁘다. 오늘 진서와 정인은 신논현역 근처에 있는 동남아 퓨전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진서는 오늘 저녁 정인과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기대한다.
진서는 약속장소 근처 대형 서점에 있다. 미술 서적이 진열된 코너에서 1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책, 저 책을 바꿔가며 신중하게 보고 또 본다. 출간한지 오래되지 않고 어려워 보이지 않는 미술사, 현대미술, 한국미술에 대한 책 한 권씩을 골랐다. 서점을 나와 약속 장소로 가니, 오늘도 정인이 먼저 와있다.
“안녕! 책 샀나 봐?” 정인은 진서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보고 물었다.
“응. 저번에 스튜디오에 갔을 때 너무 재미있어서 미술관련 책을 샀어. 공부하려고.”
“재미있었다니, 기분 좋은데. 일단 우리 음식부터 시킬까?”
두 사람은 메뉴판을 함께 보며 음식을 고른다.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고르기로 했고, 샐러드, 볶음국수, 꽃게튀김, 그리고 오렌지에이드를 시켰다.
“어떤 책 샀는지 봐도 돼?”
“그럼 당연하지.”
진서는 쇼핑백에서 책 세 권을 꺼내서 정인에게 건네줬고, 정인은 책을 빠르게 넘겨가면서 훑어본다.
책을 보고 있는 정인에게 진서가 말한다. “지난 주에 스튜디오 갔을 때, 작품 하나 하나가 너무 인상적이었어. 작품들이 좀 잔인해 보이는 면이 있는데, 그 잔인함이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라고. 인간은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 잔인해 지기도 하고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하잖아. 우리는 그런 폭력적인 본성을 문화라는 걸로 포장하고 감추고 있는데, 정인이 네 작품이 그런 것들을 잘 살려서 표현한 것 같더라고. 뭐.. 나 혼자 마음대로 해석 한 번 해봤어. 하하하” 진서는 웃으면서 말을 계속 이어간다.
“그리고 너희 부모님이 신윤복을 좋아해서 ‘월하정인’에서 아들 둘의 이름을 따서 짓고, 너는 스튜디오 이름을 또 ‘월하정인’으로 하고..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그날 보고 느꼈던 것이 나한테는 다 새로웠어 그리고 재미있었고.”
“돌아가서까지 내 작품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니, 그리고 감상 평까지 영광인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우리에게는 생존을 위한 폭력성이 내재되어있다는 생각을 나도 했고, 당연히 그것도 표현하고 싶은 것 중 하나였어.” 정인은 웃으면서 보고 있던 책을 진서에게 돌려준다.
시킨 음식이 나왔다. 진서와 정인은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대화를 계속한다.
“어떻게 그런 작품을 상상하고 만들 수 있는지 너무 궁금해.” 진서가 정인에게 물었다.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음, 내가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얘기가 있고, 그걸 또 어떻게 표현을 할지 계속 상상을 하는 거지. 상상한 걸 이렇게 저렇게 스케치도 많이 해보고, 실험 삼아 습작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다양하게 고민도 많이 하고 시도도 많이 하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 하는 것 같아. 이런 질문을 받아 본적이 없어서, 대답을 잘 했는지 모르겠네.”
“그렇구나. 알 것 같기도 한데. 내가 해보질 않아서 그런지 확 와 닿지는 않아. 좋아하는 것이 있고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게 부러워.”
진서는 볶음국수를 포크로 잘 말아 입안에 넣었다. 동남아 음식 특유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지고, 적당히 잘 익은 면발의 식감 또한 좋다. 음식이 맛있다. 그리고 이러한 음식을 정인과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
“진서야,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게 부럽다는 말을 자주하는데.. 너는 공부를 잘하잖아. 그것도 남들보다 훨씬 더 잘 하는데, 그 장점을 살리면 좋을 것 같아. 지금이라도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서 공부를 하는 거지. 석사가 됐든 박사가 됐든 학위를 딸 수도 있는 거고. 뭐 그렇게 하다 보면 진짜 좋아하는 일을 새롭게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은..” 진서가 말을 하다가 말고 머뭇거린다.
“사실은 뭐?” 정인이 뜸을 들이는 진서에게 물었다.
“이 얘기는 처음 하는 건데, 사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공부 엄청 잘했잖아. 공부를 못하면 어떻게 의대를 가고 의사가 됐어?” 정인은 진서의 말이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사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야.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잘 이해가 안돼.”
“나는 그냥 기억력이 좋은 거야.” 진서가 담담하게 말했다.
“응?” 정인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냥 기억력이 좋은 것뿐이야.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고.”
“그게 공부 잘하는 거지. 기억력 좋으면 당연히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내 말은 남들보다 기억력이 조금 더 좋은 수준이 아니라, 기억력이 특별히 더 좋아.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래? 도대체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데?”
“한 번 보고 들은 건 절대 안 잊어버려. 머리에 입력이 되면 지워지지 않는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아. 책을 한 번 보면 책 전체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수업 시간에 들은 선생님의 모든 말이랑 칠판에 적힌 것도 하나도 빠짐 없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고. 그래서 성적이 좋았던 거야.”
진서는 서래마을에서 선아, 미지, 정인과 함께 만났던 날, 넷이 나눈 대화 중 일부분을 그대로 외워 정인에게 빠르게 말해준다. 정인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날 오고 갔던 대화 그대로를 진서가 얘기한 것 같다. 그리고 진서는 정인의 스튜디오에 갔던 날 식당이랑 스튜디오에서 함께 했던 얘기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읊었다. 그날 만나자마자 말한 첫 문장부터 헤어질 때 나눈 마지막 대화까지 빠짐없이 진서는 외우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정인은 이제서야 특별히 기억력이 좋다는 진서의 말이 이해가 된다. 단순히 좋은 게 아니다. 마치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TV에 나오는 초능력자를 보는 기분이다.
“우리가 오늘 나눈 대화를 녹음을 하면 1년 뒤, 10년 뒤에도 그대로 정확하게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
“진서야, 너는 정말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데.” 정인의 눈이 휘둥그래 졌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잘했던 게 아니야. 그냥 기억력이 좋을 뿐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이해를 할 필요가 없어. 그냥 외우고 있는 것을 꺼내 쓰면 되는 거야. 이해력은 오히려 남들 보다 떨어져.”
“그 정도로 기억력이 좋으면 여러모로 장점이 많을 것 같은데. 삶의 편의성이 엄청 높아질 것 같아. 예를 들면, 공부만 해도 학교 다닐 때 큰 노력 없이 쉽게 잘할 수 있었던 거잖아.”
“아니, 그렇지 않아. 나쁜 기억도 너무 또렷하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가끔가다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해.”
“어떤 증상?”
“매번 그런 건 아닌데.. 어떤 소리나 음악을 들으면 눈 앞에 섬광이 번쩍거리고 두통이 생겨. 그리고 그 소리와 음악과 관련된 기억이 마구 떠올라. 머리가 심하게 아플 때도 있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그대로 눈 앞에 펼쳐져서 괴로울 때가 많아. 이러한 증상이 내 뜻대로 제어가 안되기 때문에 너무 힘들어. 그리고 나쁜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도 안 좋은 점이야. 그 기억이 나를 괴롭히거든. 나는 기억력이 그냥 평범했으면 좋겠어.”
“아, 그런 점이 있어? 듣고 보니 정말 힘들겠다. 나는 기억력이 좋으면 단순히 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안 좋은 기억도 분명하게 남아서 괴롭힌다는 생각은 못 해봤어. 물론 평범하게 좋은 수준을 넘어서서 그런 거지만. 그리고 두통이 있고, 섬광이 보이고, 기억이 마구 떠오르고 하는 증상은 처음 들어 봤어.”
진서와 정인은 시킨 음식을 다 먹었다. 리필을 한 오렌지에이드를 마시면서 계속 얘기를 한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는 예전보다 그런 증상이 덜 나타나는 편이야.”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이렇게 기억력이 좋다 보니, 나는 어렸을 때부터 깊게 생각하고 상상하는 훈련이 전혀 돼있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럴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르고.. 미지나 정인이 너처럼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능력은 나에게 없다는 생각을 최근에 자주했어. 그래서 그런 걸 보면 부럽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자주 나왔던 것 같아.”
“진서야, 너는 나나 미지 보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면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 공부 잘 해서 의대 가고 의사도 됐잖아.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걸 훨씬 더 부러워할걸?”
“의사는 그냥 부모님 두 분 모두 의사여서 나도 의사가 된 거였어. 부모님은 내가 의사가 되기를 엄청나게 바라셨거든. 나랑은 전혀 맞지가 않아. 나처럼 이해심, 공감 능력,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냥 외우는 능력만으로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절대 아니지. 그리고 의사를 그만두고 유학 갔다 와서 회사를 다니는 것도 나랑은 잘 안 맞았어. 가장 큰 문제는 관계였어.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능력도 많이 부족해. 휴~” 진서가 한숨을 쉰다.
“그럼 진서야, 창작하는 것이 부럽다는 말을 자주하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볼 때는 직접 도전도 해보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인데, 그림 그리는 거 배워 보면 어때?”
“그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진서의 얼굴이 밝아졌다.
“당연히 잘 할 수 있지.”
“어디서 배우면 되는데?”
“지금은 전시회 준비 때문에 힘들 것 같고, 전시회 끝나면 내가 가르쳐 줄게.”
“진짜? 우아, 너무 좋다. 완전 기대된다. 그런데 잘 나가는 작가가 나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가르쳐도 되려나. 하하” 진서가 밝게 웃는다.
“그럼 괜찮지. 나 전시회 마치고 나면 바로 해보자. 그리고 전시회 전에도 우리 작업실에 자주 놀러 와서 내가 작업하는 것도 보고 그래. 그리고 후배들이랑 같이 작업하는 것도 있는데, 그 후배들도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 그 친구들은 나랑은 전혀 다른 상상을 하고, 각자 개성을 살려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기 때문에 만나면 재미있을 거야.”
“우아, 신난다. 진짜 재미있을 것 같아.”
진서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정인은 기분이 좋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두 사람은 정인이의 차를 타고 반포로 향한다. 정인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차를 대고 진서를 집 앞까지 바래다 주기로 했다. 진서와 정인은 얘기를 하면서 걷고 있다. 진서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정인은 진서의 집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싫다. 좀더 함께 있고 싶다. 하지만 두 번째 데이트이기 때문에 여기서 헤어지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손을 잡고 싶지만 오늘은 아니다. 진서가 아파트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정인은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오니 불이 모두 꺼져있다. 부모님께서는 일찍 주무시는 것 같고, 형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진서에게 잘 자라는 톡이 온다. 진서에게 온 톡을 보니, 방금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보고 싶다. 정인도 잘 자라고 답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