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2021년 5월 7일- 진서, 정인
오후 8시 반포대교 남단 한강공원. 두 번째 데이트 이후 진서와 정인은 최소한 이틀에 한번 정도는 만나고 있다. 정인이 전시회 준비로 바쁘지만, 둘은 최대한 자주 만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진서가 스튜디오 근처로 찾아가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있고, 가볍게 차를 마시기도 하고, 정인이 일을 마치면 동네에서 밤 늦게 만나기도 하고, 아니면 스튜디오에서 정인이 작업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한다. 손을 잡고 걷는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면서 서로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누가 먼저인지 기억도 나지 않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됐다. 그 동안 늘 바쁘게만 보냈던 정인은 휴식이 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오늘은 작업을 일찍 마쳤다. 진서와 정인은 동네의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한강공원에 왔다. 금요일 밤이어서 그런지 한강공원은 사람들로 붐빈다. 조깅을 하는 사람,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사람, 라면, 치킨과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 데이트를 하는 사람, 아이와 놀아주는 사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금요일 밤을 한강에서 보내고 있다. 오늘 따라 유난히 반포대교의 조명은 더 화려하게 느껴진다.
진서와 정인은 한강 물이 흐르는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다.
“우리 한남대교까지 걸어갔다 올까?” 정인이 진서에게 물었다.
“응 좋아 좋아. 오늘 날씨 너무 시원하다.” 진서가 정인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게 시원하고 진짜 좋네. 진서랑 같이 있으니까 더 좋고 하하”
“나도 너랑 있으니까 더 좋아. 그런데 정인아, 전시회 끝나고 나면 좀 한가해지려나?”
“그럼 전시회 끝나고 나면 좀 쉬어야지.”
“우아 좋다. 우리 그때는 더 재미있게 놀자. 마구 놀러 다니자.”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여행도 가자.”
”오~ 여행 완전 좋지. 전시회 끝나면 같이 계획 한번 짜보자.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전시회 끝나고 나면, 다음 작품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프로젝트? 뭐..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진서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팔짱을 낀다.
“그럼 있지.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것에 한번 도전해보려고.”
“새로운 거 뭐?”
“그 동안 너무 페인팅만 해서 다음에는 형이랑 같이 미디어아트 쪽으로 해볼까 생각 중이야.”
“미디어아트?”
”응, 그런데 그 쪽 분야는 잘 몰라서 우선적으로 공부가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기술적인 부분은 형한테 많이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고. 형이나 나나 예술적 지향점이 다를 테니까 그런 것도 잘 맞춰서 시너지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지. 형하고 어느 정도 얘기가 되기는 했는데, 아직은 막연한 단계고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전시회 끝나고 좀 쉬고 난 다음 천천히 준비하려고. 어쨌든 재미있을 것 같아. 새로운 도전이 될 거고.”
“우아, 멋있다. 정말 나랑은 완전히 다른 것 같아. 나중에 조금이라도 어떤 아이디어가 나오면 나한테 꼭 말해줘야 해. 알았지?”
“그럼, 당연하지. 하하” 정인은 진서의 머리를 가볍게 건드리면서 대답했다.
“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하고 싶은 게 생겼어.”
“오, 그래? 뭔데?” 정인이 진서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미학을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에 가려고.”
“정말? 하고 싶은 게 생긴 건 좋은 일이긴 한데, 신중하게 결정한 거지?”
“응 네가 작업하는 것도 보고, 같이 얘기도 많이 나누고, 그리고 책도 보고하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고. 내 삶에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게 생긴 거야. 이제부터는 진짜 공부를 해보고 싶어.”
“정말 다행이다. 좋은 일이야. 그리고 진서 삶에 내가 조금은 도움이 됐다는 거네. 하하하”
“무슨 소리야? 엄청나게 큰 도움을 주고 있어. 어쨌든 나는 부모가 주입한대로, 학교가 교육한대로, 사회가 요구한대로 그 동안 너무 바보같이 살았어. 뭘 좋아하는지 한번도 스스로에게 물어 본적이 없었고, 꿈을 꿀 수 있는 기회조차 내 자신에게 주지 않았어. 내 욕구는 무시한 채 이 세상에 필요한 인간자본으로만 철저하게 길러졌던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내가 SF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사이보그랑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필요가 없으면 폐기되는 사이보그. 이제부터는 진짜 내 자신을 발견할 거고, 진짜 내 모습으로 살아갈 거야.” 진서가 다짐하듯 말했다.
“사이보그? 뭔가 매우 적절하고 통찰력 있는 비유인데. 사람이지만 사이보그랑 다를 바가 없다. 사이보그.. 인간자본.. 작품 주제로 좋은 테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작품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엄청 궁금하다.”
“지금은 막연하게 드는 생각이고,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아. 어쨌든 하고 싶은 걸 찾은 건 정말 좋은 일인데, 내가 걱정되는 것은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무조건 즐겁지만은 않다는 거야. 나도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여러 가지 힘든 것도 있고 고민도 많았어. 물론 지금도 즐겁지만은 않아. 그리고 경제적인 부분도 힘든 게 많았고, 지금이야 미지랑 같이 작업하고 나서 경제적인 걱정은 많이 해소 됐지만.. 음, 사실은 내가 의도적으로 미지랑 콜라보 하기 위해서 접근하고 이용한 부분도 있어.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장밋빛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돼.”
“미지를 이용했다고?” 진서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용했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는 모르겠는데. 미지같이 유명한 디자이너랑 콜라보를 하면 분명 그 명성 덕을 볼 수 있고, 나도 좀 유명해져서 작품을 고가에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어. 미지가 아이디어로 고민을 많이 하길래,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던 거였어. 생각보다 결과가 훨씬 좋아서 다행이었지.”
“아, 그랬었구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불가피한 선택을 할 상황이 올 수도 있고, 이상과 현실에 갭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 갭이 없을 수는 없겠지. 나도 그런 부분은 어느 정도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야. 오, 얘기하다 보니까 우리 벌써 한남대교까지 왔다.”
“그러네. 진서랑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니까.”
진서가 정인의 말에 웃는다.
진서와 정인은 걸어왔던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번에는 한강 물이 흐리는 순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그런데 나도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 정인이 말했다.
“뭔데?”
“저번에 미지랑 선아랑 서래마을에서 같이 만났을 때 미지가 그랬었잖아. 진서가 예전하고 다르다고. 옛날에는 감정표현을 안 했는데, 그때는 표현도 많이 하고 뭔가가 달라진 것 같다며 그런 말을 미지가 했었던 게 기억이 나거든. 그런데 우리가 한 달 이상 만나면서 감정 표현이 없다거나 그런 건 전혀 못 느꼈고,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진서는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어. 도대체 옛날에는 어땠길래.. 미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했어.”
“아, 그건 미지 말이 맞아.”
“미지 말대로 예전에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도 않고 드러내지도 않았던 거야?”
“아니 단순히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거의 없었어.”
진서에 말에 정인이 놀라며 묻는다. “감정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감정이 없었어. 내가 얼마 전에 얘기했듯이 환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의사를 계속 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어. 아픈 사람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
정인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 의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누군가를 배려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감정이 없다고 할 수 있나?”
“음, 나 중학교 때 우리 언니가 자살했어. 혹시 알고 있었어?”
“응, 알고 있었어.” 정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했는데, 언니가 뛰어내릴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 내 눈으로 뛰어내리는 걸 직접 본거지.”
“정말? 너무 놀랬겠다. 충격이 엄청 컸겠는데.. 그나저나 내가 괜한 말을 꺼냈네.” 정인의 목소리에 후회가 섞여있다.
“괜찮아. 얘기해도 상관없어. 그런데 그 때 나는 놀라지 않았어. 충격도 없었고 슬프지도 않았어. 언니가 내 눈 앞에서 뛰어내리는 걸 보고도.” 진서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에이 설마, 그때 충격이 너무 커서 기억을 잘 못하고 있는 거겠지. 그럴 리가 없어.” 정인이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야. 전혀 놀라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어, 오히려 언니의 선택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 그 당시 언니는 부모님이랑 갈등이 너무너무 심했어. 언니는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는데, 음대를 가기를 원했어. 하지만 부모님은 언니가 피아노로 성공할 만큼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피아노를 그만 두기를 원했었거든. 언니가 괴로워하는 것을 옆에서 매일 지켜보는 나는 언니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었고, 언니가 발코니 난간에 매달릴 때 보고도 말리지 않았어. 그리고 그 사고가 있고 나서 언니를 생각해도 슬프지가 않았어. 적어도 세 달 전까지는.. 미지는 내가 감정 표현을 안 했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감정이 없었던 거야.” 진서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낸다.
정인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없이 걷고만 있다. 진서는 정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그럼 없던 감정이 얼마 전에 생긴 거야?” 정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응, 정말 이상하게도 3개월 전에 교통사고가 난 이후 감정이 생겼어.”
“교통사고? 교통사고가 어떻게 났는데?”
“올림픽대로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 운전석 유리창에 부딪치는 거야. 운전하다가 너무 놀래서 나도 모르게 핸들을 확 틀면서 가드레일을 들이받았어.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차는 심하게 파손이 됐고 결국 폐차 했어.”
“폐차할 정도면 엄청 큰 사고였네. 다치지는 않았어?”
“응, 그렇게 심하게 부딪쳤는데도 운이 좋게 가벼운 뇌진탕 증상만 있었고 몸은 전혀 다치지 않았어. 에어백이 터지면서 얼굴에 찰과상을 조금 입었는데, 그건 금방 없어졌어.”
“그나마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다. 그런데 나비가 와서 부딪쳤다고? 운전 중에 나비가 유리에 부딪쳤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네.” 정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나비가 달리는 차 앞에서 한참을 날고 있는 거야. 그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갑자기 유리에 부딪치더라고. 진짜 너무 놀랬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차 사고 이후로 감정이 생겼어.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하기도 하고,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언니가 생각이 나서 슬퍼지기도 하고,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갑자기 생겼어. 그런데 정인이 너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울할 때 우울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기뻐. 아마 감정이 없어 보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진서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정인이 닦아준다.
“내 생각에는 진서가 감정이 없었던 게 아니라, 어렸을 때 언니 일로 충격이 너무 커서 기억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니야. 나 기억력 엄청 좋다는 거 알잖아. 아마 이해하기 힘들 거야.”
“그렇긴 하지. 내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을 겪었으니, 내가 이해한다는 건 말이 안되긴 해.” 정인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래도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닐 텐데.. 그럴 수가 없는데..” 정인은 진서가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했다.
반포대교 남단에 도착했다. 밤이 늦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많다. 한강공원을 나와 구반포 방향으로 둘은 걸어가고 있다. 진서의 집까지 말 없이 걸었다. 집 근처에 도착한 진서와 정인은 마주보고 얘기를 한다.
“오늘 내가 괜히 힘든 얘기를 꺼낸 것 같아서 미안해.” 정인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힘들고 슬프지만 이런 감정이 내게 있다는 것이 좋고, 정인이랑 이러한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좋아.”
“그렇긴 해도 본의 아니게 아픈 데를 건드린 것 같아서..”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
“어떤 생각?”
“지금 내 삶이 기쁨과 슬픔으로 혼재 되어있다는 생각. 몇 달 전에 교통사고가 나고 또 한 달 전에 정인이를 만나고 내 삶이 좋게 바뀌었다는 생각을 많이 해. 정인이랑 사귀게 되면서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 감정이 없을 때는 삶이 유한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이 기쁨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든. 그리고 언니를 생각하면 많이 슬픈데.. 이 슬픈 감정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언니한테 많이 미안하지만.”
“요새 심정이 많이 복잡하구나. 지금 이런 얘기하는 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진서가 날 만나서 긍정적 변화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기분도 좋아.”
“조심스러울 게 뭐가 있어. 기분 좋은 걸 좋다고 하는데.”
“그래도 언니 얘기가 나와서 진서는 슬픈데, 기쁜 감정이 드는 게 왠지 미안해서..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지금 이 좋은 감정을 솔직히 표현도 하고 싶고 말해주고도 싶었어.”
“그랬구나. 나 지금 슬프지 않아. 너무 좋아.”
진서와 정인은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입을 맞춘다. 진서는 정인의 허리를 감싸고, 정인은 진서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달콤하고, 촉촉하고,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고 체온이 전달 된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잠시 후 입술을 떼고 숨을 고르며 서로를 바라본다.
“정인아, 괜찮으면 우리 집에 가서 맥주 한잔 할까?”
“정말? 나는 좋아.”
“내일 작업하는데 괜찮아?”
“응 괜찮아. 안 그래도 오늘 내일은 좀 쉬려고 했어.”
진서와 정인은 손을 잡고 진서의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