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7일- 미지

by 킥더드림

13. 2021년 5월 7일- 미지
미지는 평소 보다 사무실에서 일찍 나와, 부모님 집이 있는 반포로 가고 있다. 오랜만에 가족을 보러 간다. 퇴근 시간 전이어서 차가 많이 막히지는 않는다.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해서 주차를 했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동생 태준이가 달려와 아이처럼 밝게 웃으며 미지를 안는다. 동생은 나이가 서른이 되었지만, 어린아이나 다름이 없다.
“누나다, 누나다. 누나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다.” 동생은 미지를 안고 등을 두드리며 반가워한다.
“그래 오랜만이네. 태준이 잘 있었어?” 미지도 동생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응 잘 있었다. 누나도 잘 있었다?”
“그럼 누나도 잘 있었지.”
“미지, 왔니?”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와 미지를 반긴다.
“응 엄마, 나 왔어.”
“엄마도 잘 지낸다. 잘 지낸다.” 태준이 말했다.
동생의 말에 미지와 어머니는 같이 웃는다. 그 웃는 모습을 보고 동생도 따라 웃는다.
“아빠는?”
“아빠는 친구들 만나러 갔어. 네가 온다는 연락을 몇 일 전에만 줬어도 약속을 미뤘을 거라고 아쉬워하던데. 그러니까 미리 연락 좀 주지. 너는 어떻게 항상 즉흥적이냐.”
“엄마가 몰라서 그러는데 나처럼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 없거든.”
”너야 말로 몰라서 그러지 너 좀 즉흥적인 데가 있어. 그나저나 윤서방은 왜 안 왔어?”
“윤서방은 일하고 있어. 바빠서 오늘을 못 와.”
남편은 일 때문에 못 온다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미지의 결혼 생활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미지야, 손 씻고 와. 밥 먹자.”
“누나 손 씻어. 밥 먹자, 밥 먹자. 같이 먹자.” 동생은 오랜만에 누나랑 같이 밥을 먹는 게 마냥 신나는 모양이다.
갈비찜, 전, 잡채, 그리고 미지가 좋아하는 밑반찬으로 저녁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엄마, 명절도 아니고 힘들게 뭐 이렇게 많이 차렸어? 간단하게 먹자니까. 오후에 연락했는데 언제 이렇게 준비했대.” 어머니를 괜한 고생을 시킨 것 같아 미지는 마음이 불편하다.
“엄마 요리하는 거 좋아하잖아. 오랜만에 너 오는데 엄마가 좋아서 요리 좀 했다. 엄마 하고 싶은 거 좀 하면 안되냐? 그리고 네가 즉흥적으로 온다고 해서 엄마도 즉흥적으로 요리 좀 해봤다.”
동생은 이미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 미지도 맛있게 먹는다.
“요새 일은 어때? 별 문제 없이 잘 되고 있어?” 어머니가 물었다.
“뭐.. 항상 어려움이야 있지만, 그래도 별 문제 없이 잘 되고 있어. 요새는 같이 작업할 해외 작가를 찾고 있는 중이야.”
“미지야, 너무 일로만 엮여서 사람 만나지 말고, 진서나 선아 같은 어렸을 때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그래. 대인관계가 넓고 친구가 많은 것도 좋지만, 옆에 진짜 친구가 있어야 돼. 네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진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 것 같아? 그리고 주위에 돈 보고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고.”
“요새 진서랑 선아는 적어도 한두 달에 한번은 만나고 있어. 그런데 엄마가 말하는 진짜 친구가 뭐야?” 미지는 밥을 먹다가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진짜 친구는 너한테 좋은 일이 있을 때,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도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는 친구지. 그거 절대 쉬운 거 아니다.”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친구라..”
미지는 어머니가 한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을까? 음… 엄마 말대로 나부터가 쉽지 않을 것 같네.’
“너 건물 알아본다는 건 어떻게 되고 있어?”
“너무 급하게 살 마음은 없어서, 천천히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그래 잘 생각했다. 엄마 생각에도 너무 급하게 서두를 필요 없을 것 같아. 괜히 서두르다가 사기 당할 수도 있어. 어쨌든 조심해.” 어머니는 계속해서 잔소리를 한다.
“조심해. 조심해.” 동생이 어머니의 말을 따라 한다.
“엄마, 걱정 좀 하지마. 나 돈 많아. 그럴 리도 없지만, 건물 하나 정도 사기 당해도 큰 문제 없으니까 제발 걱정 좀 그만해. 그리고 태준이 걱정도 그만하고. 나중에 내가 태준이까지 다 챙길 수 있어.”
미지는 저녁을 먹고 동생이랑도 같이 놀고, 어머니와도 한참을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나서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술이 약간 취했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미지를 붙잡았다. 아버지는 미지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가 보다. 미지가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일은 잘 되고 있는지 이것저것 물어본다. 이른 나이에서 사업을 시작해서 잘 해나가고 있는 딸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많이 된다. 미지는 아버지와 30분 정도 얘기를 하다 나왔다.

부모님 집에서 나온 미지는 차에 시동을 걸어 놓고, 담배 한대를 피운다. 담배를 다 피우고 차에 타려고 문을 여는 순간, 저 멀리 아파트 사잇길로 걸어가는 진서를 발견한다. 진서는 미지의 부모님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미지는 반가운 마음에 진서를 부르려고 했지만, 옆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보고 부르려다 말았다. 진서 옆에 웬 남자 한 명이 같이 걷고 있다. 진서의 몸에 가려서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보이지가 않는다.
‘진서, 요즘에 연애하나 보네.’라고 생각하면서 차 문을 닫았다.
미지는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진서 뒤를 빠르게 따라 붙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진서 옆에 있는 남자는 최정인인 것 같다. 미지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조심스럽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뒷모습의 실루엣과 걸음걸이가 정인이인 게 확실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진서가 사는 집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미지는 진서와 정인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랬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뭐지? 도대체 둘이 뭐야? 언제 저렇게 됐나?’ 지금 두 사람을 바라보는 미지의 마음은 혼란스럽다.
미지는 들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계속 따라간다. 손은 깎지를 껴 단단히 잡고 있고, 손을 잡은 팔은 서로에게 바짝 밀착되어 있다. 뒷모습만 봐도 둘 사이의 친밀함과 다정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말 없이 걸으면서, 가끔 미소 띤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입가의 미소에서 두 사람이 사이가 얼마나 달콤한지가 느껴지고, 상대를 바라 보는 눈빛에서는 서로를 향한 간절함 같은 것이 엿보인다. 미지는 진서에게서 저런 눈빛이 나오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다정한 두 사람을 몰래 지켜보고 있자니, 미지의 마음 속에서는 질투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미지는 정인은 세련된 스타일에 성격이 밝고 감성이 풍부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달리 내성적이고, 정서가 메마르고, 스타일은 수수한 진서를 만나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 진서에게 화려한 코트를 선물했던 것이 기억난다. 갑자기 그날 진서에게 화려한 코트를 준 것이 후회가 된다. 두 사람은 진서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 했다. 미지는 근처에 있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둘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한 2분에서 3분정도 얘기를 나누더니, 말없이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다 입을 맞춘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미지의 동공은 크게 확장되고, 심장은 빠르게 뛴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고 싶지가 않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질투심이 폭발한다. 진서와 정인은 입을 맞추고 나서,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진서의 집으로 같이 들어갔다. 미지는 머리가 멍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두 사람이 들어간 아파트 입구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자신의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차에는 여전히 시동이 걸려있다. 차에 앉았다. 지금 상태로 운전을 하면 안될 것 같다. 밖으로 나와 담배 한대를 피우고,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떻게 하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정인이랑 진서는 어울리지 않아. 혹시 벌써 같이 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서에게 화려한 코트를 선물한 것이 계속 후회된다. 차에 앉아서 30분을 보냈지만, 뛰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다. 운전은 도저히 못할 것 같아,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집에 도착했다. 자동으로 현관 등이 켜진다. 신을 벗고 거실로 들어오니, 현관 등이 꺼졌다. 집안은 어둡고 적막하다. 식탁 위에 백열등을 켰다. 와인 셀러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고, 와인 잔도 가지고 왔다. 식탁에 앉아 코르크 마개를 따고, 와인을 잔에 따른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게 마신다. 처음으로 집에서 담배를 피운다. 집안 다른 곳의 모든 등은 꺼져있고, 식탁 위의 등만 켜져 있다. 사방이 어둡고 백열등의 은은한 조명만이 식탁을 비추고 있으니, 담배를 피우며 와인을 마시고 있는 미지의 모습은 마치 연극무대에서 홀로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 같다. 미지가 내뿜는 연기는 백열등 조명 밖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연초가 타면서 나오는 연기는 백열등 빛을 타고 하늘거리며 올라간다. 와인을 마시고 또 마신다. 미지는 화가 가라앉지 않고, 진서와 정인이 입을 맞추는 모습이 자꾸 떠올라 미칠 것 같다. 금새 와인 반 병을 마셨다.
‘정인이마저 진서에게 빼앗기다니.. 내 삶은 도대체 왜 이런 걸까?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 여기까지 달려 왔을까?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이 싫다. 자신의 삶은 더 싫다. 마시고 또 마신다. 와인 한 병이 거의 다 비워져 간다. 마지막 잔을 따랐다. 진서와 정인이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떠올라, 화가 더욱더 치밀어 오른다. 미지는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힘껏 던졌다. 던진 잔은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고, 사방으로 파편이 튄다. 붉은 색 와인이 하얀 벽지를 타고 흘러내린다. 미지는 둘을 갈라놓고 싶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미지는 식탁에 놓여있던 와인 병도 벽을 향해 세게 던졌다. 병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진 와인 병의 파편은 잔이 깨질 때 보다 더 크게 사방으로 튀었다. 그 중 작은 조각 하나가 미지의 왼쪽 볼을 스쳤다. 볼에 깊게 패인 상처가 났고, 상처에서 피가 스며 나온다. 피가 계속 스며 나오면서, 핏방울이 됐다. 핏방울은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 밑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상처에서 핏방울이 맺힌다. 미지는 미동도 없이 와인으로 얼룩진 하얀 벽을 바라보고 있다.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한참을 벽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식탁위로 엎어져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백열등의 주황색 불빛만이 미지의 등을 쓸쓸히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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