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0일- 정인

by 킥더드림

14. 2021년 5월 10일- 정인
정인은 스튜디오에 있다. 작업에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진서의 기억력과 언니의 자살에 대한 얘기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몇 일 전 진서가 했던 말은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믿기지도 않는다. 언니가 자살했을 때 슬프지 않았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진서는 감정이 없었던 게 아니다. 언니를 잃은 아픔과 슬픔을 스스로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 기억과 감정을 완전히 분리시켰음에 분명하다. 기억의 일부는 왜곡했고, 나머지는 지웠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받은 충격과 슬픈 감정은 무의식 깊은 곳에 가둬놓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진서가 살기 위한 유일한 방어기제였을 것이고, 이미 언니가 떠나버린 현실을 되돌릴 수 없었기에 자신만의 판타지를 만들어 자신을 거기에 가둬놓고 살았음에 틀림없다. 진서는 다른 사람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 또한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공감하지도 못한 거였다. 진서가 정서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프다. 정인은 진서가 자기 감정에 더 솔직해지고, 감성이 더 풍부해질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삶, 죽음, 충동, 슬픔, 상처, 상실감, 왜곡된 기억, 지워진 기억, 배제된 감정, 기억과 감정의 분리, 무의식, 판타지, 생존, 욕망, 공감, 문명, 사랑..
이러한 주제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다니고 새로운 영감이 떠오른다. 특히 기억, 감정, 무의식, 생존, 문명, 판타지는 다음 프로젝트에 좋은 테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번에 진서가 말한 사람인데 사이보그랑 다름이 없다고 얘기한 주제와도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롭게 도전할 미디어아트의 방향성이 어느 정도 잡히고 있다. 진서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이전 연애에서는 이러한 영감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연애를 하면서 최근 진서와 나누고 있는 짜릿한 감각과 달콤한 감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무뎌질까 봐 두렵다. 인간은 왜 지속적으로 동일하게 반복되는 자극에 감각이 둔해지는 것일까?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무섭다.

이번 전시회도 반드시 성공적이어야 한다. 진서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정인은 다시 작업에 몰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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