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021년 4월 14일- 진서, 정인
진서는 정인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혹시 정인이 아닌지 발신번호를 빠르게 확인하고는 했다. 일주일 내내 모든 신경이 스마트폰에 가 있었다.
‘정인이 술을 많이 먹어서 기억을 못하나? 아닌데 그날 늦게 합류해서 술 많이 안 먹었는데’’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나?’
‘분명 먼저 스튜디오에 놀러 오라고 했는데.’
‘무슨 일이 생겼나?’
‘전시회 준비에 정신이 없나?’
‘여자친구가 있나?’
진서는 정인이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렇게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진서는 이틀을 망설이다가 며칠 전 정인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톡으로 안부로 물었고, 정인에게서 바로 답이 왔다. 오늘 저녁을 함께 먹고 정인의 스튜디오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상수역 근처. 진서는 정인과 상수동에서 만나 초밥을 먹기로 했다. 약속 시간인 7시 반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약속장소 주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걸으면서 상수동에는 어떤 가게가 있는지 둘러본다. 작은 골목골목 마다 예쁜 식당과 카페가 많다. 해가 지기 직전의 하늘은 점점 붉게 변해가고 있다. 해가 아직 완전히 지지는 않았지만, 가로등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상수동 중심가로 들어오니 사람들도 많고 자동차도 많다. 넓지 않은 길에 사람들과 차들이 무질서하게 얽혀 있는 모양이다. 주변 건물의 외벽과 어디론가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오렌지색 빛으로 물이 들었다. 붉게 어두워지는 도시 풍경이 아름답다. 핸드폰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시간 5분 전이다. 진서는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한다. 혹시 늦을까 빨리 걷는다. 빠른 발걸음에 맞춰 심장도 빨리 뛴다. 약속 장소인 회전 초밥집에 도착하니, 정인이 먼저 와 있다. 정인은 반가운 얼굴로 진서를 맞이한다. 식당 안은 마주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은 없고, 자동으로 돌아가는 긴 회전초밥 레일 앞에만 테이블이 있다. 진서와 정인은 나란히 앉았다. 식당 안 공간은 조금 협소한 편이고, 전반적인 분위기는 편안하고 아늑하다. 진서는 첫 데이트라고 굳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든다. 생맥주 한 잔씩을 시켰다. 그리고 레일에서 연어초밥을 골라 하나씩 나눠 먹는다. 처음 만난 날과 같은 어색함은 없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스튜디오 정리 다 끝내고 내가 연락하려고 했는데, 진서가 먼저 연락을 해서 놀랬어.”
“왜 놀래?” 진서가 물었다.
“진서가 먼저 연락을 할거라고는 생각을 전혀 못했거든.”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혹시 잊어버렸나 해서 먼저 연락했어.”
“그랬구나. 잘했어.”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진서와 정인은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한 모금씩 마신다. 시원하고 목 넘김이 부드럽다.
“맥주는 첫 모금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아.” 정인이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했었는데. 맥주는 제일 처음 마셨을 때가 가장 맛있고, 그 다음부터는 맛이 조금씩 덜해지는 것 같아.”
정인은 레일에서 참치뱃살 초밥 두 점이 놓여 있는 접시를 집었다. 그리고 각자 하나씩 먹는다.
“그리고 여기 초밥도 진짜 맛있다.” 진서가 만족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맛있지? 여기 나름 유명한 집이야.”
“어쩐지 맛있더라. 하하”
저녁을 먹고 나오니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진서와 정인은 정인의 스튜디오가 있는 홍익대학교 근처로 걸어간다. 좁은 골목길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 10분 정도 걸으니, 정인의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스튜디오는 건물 맨 위층인 5층에 있고, 한 층을 다 쓰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5층까지 걸어올라 갔다.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문 옆에 ‘Studio 월하정인(月下情人)’이라고 쓰여진 현판이 보인다. 현판은 매우 세련된 디자인과 글씨체로 만들어졌다. 스튜디오는 방이 없는 하나의 큰 공간이다. 입구 맞은편 끝 창가에는 컴퓨터가 있는 큰 책상이 있다. 책상 뒤로는 가로로 길게 창문들이 나 있고, 창문 밖으로 작은 테라스가 보인다. 창문의 오른쪽 끝에 테라스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다. 책상 앞에는 긴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다. 스튜디오 가운데는 엄청나게 큰 작업 테이블이 있고 팔레트, 물감, 붓, 스케치 종이 등이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있다.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은 세 군데 벽면을 따라 놓여 있고, 한 쪽 벽면에는 작업 중으로 보이는 큰 캔버스가 있다. 캔버스의 높이는 웬만한 사람의 키보다 크고, 옆으로는 족히 3미터는 되는 것 같다. 들어오자마자, 진서는 작업실을 전체적으로 둘러본다.
“스튜디오 이름은 왜 ‘월하정인’으로 지은 거야? 특별한 의미가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부모님이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을 좋아하시거든. 내 이름도 거기서 따온 거고, 그래서 별 고민 없이 스튜디오 이름을 그냥 그걸로 정했어.”
“아, 그렇구나.” 진서는 휴대폰으로 월하정인을 검색 한다.
“우리 형 이름은 하정이야, 최하정. 하하하” 정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두 형제의 이름을 다 따서 지을 정도면, 그 그림을 정말 좋아하시나 보다. 나는 솔직히 미술은 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 책에서 유명한 미술 작품 해설이나 설명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때뿐이야. 나의 주관적 관점에서 감상하거나 즐기지는 못하겠더라고. 주위에 미술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읽었던 책에서 하는 설명을 그대로 외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 그들은 마치 시험 공부하듯이 그림을 감상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걸 정말 즐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음,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은 없긴 한데, 내 생각에는 그것도 미술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누군가 해놓은 해설과 다른 사람의 시각을 통해서 미술을 이해하고 즐기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책도 보고 전시회도 많이 다니다 보면, 그런 시간과 경험들이 쌓여서 자신만의 시각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런가? 나는 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으려나.”
“마음을 좀 열어봐. 왜 꼭 주관적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예술은 주관성과 객관성 모두 다 필요한 것 같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예술을 이해하는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어. 나는 예술을 즐기고 감상하는 것도 공부나 훈련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음, 공부라..”
진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더니, 말을 계속 이어간다.. “그럼 형은 어떤 일을 해? 혹시 형도 화가?”
“아니, 형은 영화 감독이야.”
“정말? 유명한 감독? 완전 예술가 집안이네.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하하하 유명한 감독은 전혀 아니고, 한편 찍고 흥행이 안돼서 지금은 아르바이트하고 있어.”
“어떤 아르바이트?”
“요새 유트브 많이 보잖아. 유튜버들이 촬영한 거 편집하는 일도 하고, 기업에서 제작하는 영상도 의뢰 받아서 촬영하고 편집해서 납품하고 그러나 봐. 그런 일하면서 틈틈이 다음 작품 준비도 한다고 하는데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 그렇구나. 한 편 만들었다는 영화는 어떤 영화야?”
”아마 진서는 처음 들어보는 영화일거야. 뱀파이어 영화인데..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 여자가 뱀파이어였다. 뭐 그런 내용이야. 저 예산 영화다 보니 배급이 쉽지 않았던 것 같더라고. 그래서 흥행이 잘 안됐지.”
“와! 멋지다.”
“멋지기는 지금 아르바이트 하고 있다니까. 하하” 정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걸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산다는 게 부럽고 멋있어.”
“나중에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뭐.. 불투명한 삶이지. 삶이 너무 투명해도 재미가 없긴 하지만..”
”그래 맞아. 너무 투명한 건 재미가 없어. 그런데 벽에 하나씩 놓여있는 작품들이 이번에 전시할 작품인 가봐. 나 봐도 되지?” 진서가 벽에 세워진 작품들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보여 줄려고 놀러 오라고 한 거였어.”
진서는 벽에 놓여있는 그림들을 보기 시작한다. 모든 그림의 소재는 연필이다.
작품 #1 수술실
1-1 어두운 수술실에 조명이 환자를 비추고 있다. 의사가 심장 수술을 하고 있다. 가슴이 절개 되어 환자의 심장이 보인다. 절개된 가슴 부위 주변에 덮여있는 천에는 피가 묻어있다. 의사는 끝이 뾰족한 연필을 가지고 심장 수술을 하고 있다.
1-2 수술실에 환자가 누워있고 두개골이 절개되어 있다. 주름진 뇌의 모습이 보인다. 절개된 부위 아래를 막고 있는 천에는 피가 묻어있다. 의사는 환자 머리 쪽에 앉아서 뇌수술을 하고 있다. 뇌수술을 하는 도구는 끝이 뾰족한 연필이다.
1-3 수술실에 누워있는 환자의 상반신만이 보인다. 환자의 얼굴은 눈만 보이게 되어있는 녹색 천으로 덮여있다. 환자의 한 쪽 눈은 어떤 기구로 아래 위로 잡아 당겨 크게 벌려져 있다. 의사는 뾰족한 연필을 들고 있고, 연필 뒷부분은 주사기 모양이다. 의사는 현미경으로 환자의 눈을 들여다 보며, 연필로 눈을 찔러 주사를 놓고 있다.
작품 #2 살생
2-1 하늘에 여러 대의 전투기가 있다. 도시를 폭격하고 있다. 떨어지는 포탄은 연필이다. 도시는 불타고 있다.
2-2 여러 명의 군인들이 어떤 지역의 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총으로 학살하고 있다. 날아가는 총알은 연필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필 총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고, 바닥에는 연필 총알이 박힌 시체들이 쌓여있다.
2-3 공장형 도축장에 도축된 수많은 소들이 갈고리에 거꾸로 걸려있다. 사람들이 뾰족한 연필로 소를 잘라 부위별로 해체하고 있다.
작품 #3 말
3-1 부모가 초등학생 자식한테 소리를 지르고 있다. 고함을 치는 부모 입에서 다양하게 생긴 연필이 화살처럼 나오고 있다. 그 연필은 아이의 심장에 꽂힌다. 아이의 눈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3-2 교실에서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업을 하는 선생님 입에서는 많은 연필이 나오고 그 연필은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머리에 꽂힌다. 학생들 얼굴은 우울하다.
3-3 양복을 입은 직장인 10명이 긴 회의용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다. 한 사람은 일어서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말을 하기도 하고 고함을 치기도 한다. 앉아 있는 사람들 입에서 연필이 나와 프레젠테이션 하는 사람의 온 몸에 박힌다. 서있는 사람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고, 가슴에는 피가 흘러내린다.
작품 #4 사랑
4-1 젊은 남녀가 포옹을 하고 있다. 포옹을 하고 있는 두 남녀 가슴을 사람 크기의 커다란 연필이 관통하고 있고, 남녀의 등 뒤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두 남녀의 뒤 배경은 아주 큰 붉은 색 하트이다.
4-2 남자가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치며 고백을 하고 있다. 꽃의 가지는 연필이다. 여자는 꽃이 달린 연필로 고백하는 남자의 심장을 찌르고 있다.
4-3 남자가 고백을 거절하고 뒤돌아 가는 여자에게 꽃이 달린 연필을 던진다. 연필은 여자의 등과 뒤통수에 꽂힌다. 여자의 머리와 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작품 #5 생명
5-1 이분할 된 캔버스 한 쪽에 이중나선 구조의 DNA가 크게 그려져 있다. 뾰족한 연필이 DNA를 여러 부분을 잘라내고 있다. 이분할 된 캔버스 다른 한 쪽에는 팔과 다리가 연필인 사람이 서있다.
5-2 캔버스 중앙에 진핵세포 단면이 그려져 있다. 세포 안에는 염색체, 핵, 핵막, 소포체, 골지체, 리소좀, 리보솜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짧고 뾰족한 수 많은 연필이 세포 속에 그려져 있다.
작품 #6 슬픔
6-1 어두운 방에 사람을 형상화한 연필이 침대에 누워있다. 누워있는 연필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6-2 캄캄한 밤, 희미한 가로등이 비치는 놀이터. 여자 사람을 형상화한 연필이 그네에 앉아서 울고 있다. 남자 사람을 형상화한 연필이 놀이터에서 울고 있는 여자 연필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 공중에는 작은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닌다.
진서는 완성된 작품을 전체적으로 둘러 보고, 테이블에 앉았다. 아직 작업중인 작품도 여러 개가 여기저기 놓였다. 정인은 컴퓨터가 있는 책상 뒤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다. 정인은 커피 두 잔을 가져와 진서와 마주보고 앉는다. 진서는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럽게 입으로 불어가면서 마신다.
“잘 봤어?” 정인이 물었다.
“응, 재미있어.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데 왜 연필을 소재로 한 거야?”
“아.. 연필.. 그거는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소통해보고 싶어서야.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에게 지식이 쌓여가면서 세상이 많이 변해 왔잖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삶이 훨씬 편리해지기도 하고, 수명도 길어지고, 교통과 통신으로 세계가 연결되고, 생명과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등의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반면에 지식이 폭력과 억압의 도구로 쓰이기도 하고, 지식과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자본을 독과점하기도 하고, 지식의 수준 차이에 따라 불평등과 차별이 생기기도 하고, 가짜 지식과 정보가 세상을 어지럽히거나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는 등의 부정적인 면도 많이 있잖아. 이런 지식이 갖고 있는 양가적인 속성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었고. 음.. 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던져보고 싶었어. 어쨌든 서론이 길었는데 연필이 소재인 이유는.. 일반적으로 연필은 기록하고 공부할 때 쓰이는 도구이기는 하지만, 뾰족하게 깎으면 실제로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 이렇게 지식이 갖고 있는 양가적인 속성하고 연필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속성이 비슷하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어. 그래서 연필은 지식과 폭력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기호가 아닌가 하는 아이디어에서 연필을 소재로 선택한 거였고, 그래서 연필 시리즈로 지금 작품을 만들고 있는 거야. 하하하 내 작품을 너무 거창하게 포장한 것 같은데.” 정인이 멋쩍게 웃는다.
“정말, 신기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한번도 없는데. 작품 중에 가장 궁금한 것이 세포 안에 연필이 있는 거야. 거기 연필이 왜 있는 거야?”
“그거는 미토콘드리아 대신 연필을 그려 넣은 거야.”
“미토콘드리아?”
“응, 미토콘드리아. 미토콘드리아는 원래는 독립적인 미생물이었다는 가설이 있다고 하더라고. 원래는 별개의 생명체였는데, 수십억 년 전에 우연히 동물의 세포 안으로 들어와서 공생하게 되었대. 별개의 생명체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의 기관이 되고, 에너지 대사 효율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게 재미있지 않아? 그리고 우리 몸의 기관 중에 미토콘드리아만이 유일하게 모계를 통해서만 유전이 된다는 것도 신기했어. 뭐 이런 것들이 너무 재미있더라고. 지식도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학습되고, 체득되고, 삶에 영향을 미치고, 세대를 거쳐 전달되고 하는 게 억지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미토콘드리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지식은 문명의 이기를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또 편견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그 편견은 우리 몸 안에 뿌리깊게 박히기도 하고. 다윈의 진화론이 신대륙의 원주민을 착취하고 학살하는 걸 합리화하는 도구로도 쓰였다는 말도 있으니까. 이런 지식을 어떻게 체득하느냐에 따라 미토콘드리아처럼 잘 공생을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
“우아, 진짜 너무 재미있다. 나 지금 다른 세상에 와있는 거 같아.”
“정말? 재미있다니 다행이다.” 정인이 진서를 보면서 활짝 웃는다.진서와 정인은 작품에 대해 한참을 얘기하다, 스튜디오에서 나왔다. 정인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양화대교 북단에서 강변북로로 진입해 달리고 있다. 진서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밖을 본다. 어두운 밤 하늘, 가로등이 비치는 한강의 물결, 어슴푸레 보이는 밤섬, 불이 꺼지지 않은 여의도의 빌딩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차 밖의 풍경은 금새 뒤로 밀려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얼마 달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정인의 차는 어느새 강변북로를 빠져 나와 동작대교를 건넜다. 정인은 진서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웠다.
“차 안 막히니까. 금방 도착하네.” 진서는 무언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러게. 다음에 또 보자.”
“다음에 언제? 또 연락 없는 거 아냐.”
“하하하 다음주에 보자. 내가 주말에 연락할게.” 정인이 어색하게 웃는다.
집에 들어온 진서는 스튜디오에서 본 정인의 작품에 대해서 계속 생각한다. 지식과 폭력.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지만 재미있다. 살면서 처음으로 재미있는 것을 찾은 것 같다. 그리고 빠져든다. 오늘도 진서는 수면제 없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