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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겸과 헤어지고 나서 민구는 바로 지하철을 타러 가려다 쇼핑몰에 온 김에 저녁까지 해결하기로 했다. 혼자 먹을만한 식당을 둘러보다 돈가스 전문점에 들어왔다. 안심 돈가스 세트를 시켰다. 식당에는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 민구밖에 없다. 평일이면 혼자 먹는 사람이 꽤 있었을 텐데 휴일이어서 없는 것 같다. 남자친구랑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수겸이는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궁금하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은 쇼핑몰에 있는 사람들처럼 표정이 밝지 않다. 쇼핑몰 안에 판타지를 일으키는 가스를 누군가 살포해 놓았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사람들의 표정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 가스는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현실적인 것만 보고 살아가기에 너무 힘든 세상이다. 민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혼자 탔다. 19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는 “위이이잉”하는 묵직하면서도 매끈한 기계음을 내며 올라가기 시작한다. 오늘따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민구의 마음에 이상한 적막함을 만들어 낸다. 19층이 가까워지자 엘리베이터는 더욱 묵직한 기계음을 내며 속도를 늦추다, “딩동”하는 경쾌한 벨소리와 함께 완전히 멈추었다. 문이 열렸고 민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니 마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을 것 같은 휑한 거실이 드러난다. 거실에는 TV, 소파, 테이블, 에어컨, 액자, 커튼 같은 보통의 집이라면 꼭 있어야만 할 것들이 하나도 없다. 벽지에는 물건들이 있었던 흔적들만 묻어 있다. 소파의 흔적과 TV를 걸어 놓았던 흔적이 가장 눈에 띈다. 얼마 전 아직까지는 법적으로 아내인 지우가 이삿짐 센터를 불러 혼수로 해왔던 물건을 모두 가지고 갔다. 집에서 쾌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환기를 시키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의 유리문을 옆으로 당겨 열었다. 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밀고 들어온다. 민구는 아래를 내려다 본다. 학원을 가는 학생, 개와 함께 산책하는 노인, 근무 중인 보안 요원, 벤치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가족이 눈에 들어온다. 여유로워 보이는 휴일 저녁이다. 시선을 좀 더 당겨 수직 방향으로 내려본다. 아파트 건물 앞 화단에 있는 나무와 풀이 보인다.
‘여기에서 뛰어 내리면 바닥에 닿는 순간 고통이 느껴질까?’
‘만약에 뛰어 내린다면 지금 보다 편안해질까?’
‘19층이라도 순식간에 떨어지겠지?’
민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베란다의 문을 닫는다. 이런 생각은 환상적인 마무리와 거리가 멀다. 샤워를 하고 편안 옷으로 갈아입었다. 민구는 서재로 갔다. 거실, 부엌, 다른 방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사리지고 없지만, 서재만은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있다. 긴 나무 책상, 3단 서랍장, 회전 의자, 최신형 노트북, 메모지, 각종 필기구, 스탠드, 탁상용 달력, 한 쪽 벽 전체를 막고 있는 책장, 그리고 그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책들. 모두 그대로이다. 집안 다른 모든 곳은 얇고 평면적으로 변했는데, 여기만은 깊이와 입체감을 유지하고 있다. 민구는 접혀 있던 노트북을 열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책상을 만진 손에 하얀 먼지가 묻었다. 민구는 물티슈 한 장을 꺼내 책상 위를 가볍고 길게 한 번 문질렀다. 의외로 먼지가 많다. 생각을 해보니 청소를 안 한지 꽤 됐다. 물티슈 몇 장을 더 꺼내 본격적으로 닦기 시작한다. 책상, 의자, 서랍장, 노트북, 마우스, 책장 선반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닦았다. 책을 읽을까 하다 생각이 바뀌어 물티슈를 몇 장 더 꺼내어 바닥을 닦는다. 먼지가 엄청 묻어 나온다. 꽤 많은 물티슈를 사용해서 바닥 전체를 깨끗이 닦았다.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깨끗해진 느낌이 발바닥에 그대로 전해진다. 책상 앞에 앉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스탠드 등을 켰다. 백열등 불빛이 책상 위를 비추니 분위기가 조금 화사해 졌다. 물티슈로 차갑게 변한 나무의 질감이 불빛으로 따뜻해진 느낌이다. 작은 등 하나가 이상한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민구는 잠시 인터넷을 하다가 책을 읽는다. 한참 읽다가 우울증 약을 깜박하고 안 먹은 것이 생각났다.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낀 후 책을 덮었다. 책을 덮자마자 스마트폰 벨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수겸이다. ‘지금 한창 남자친구 만나고 있을 시간 같은데, 무슨 일이지?’ 벨이 여러 번 울린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겸아!”
“민구야! 집에 잘 들어갔어?”
“그럼 나야 잘 들어왔지. 너 남자친구 만난다고 했잖아.”
“만났지. 오늘 좀 일찍 헤어졌어.”
“벌써? 지금 몇 시인가?” 민구가 노트북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10시도 안 됐네. 진짜 일찍 헤어졌구나. 저녁은 먹었어?”
“그럼 먹었지. 남자친구하고 먹었어.”
“너는 저녁 먹었어?”
“나는 집 근처에서 친구랑..” 민구가 고개를 흔든다. “아니 헷갈렸다. 너랑 헤어지고 쇼핑몰에서 혼자서 간단하게 먹고 집에 왔어.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생일인데 저녁 혼자 먹었어?”
“응. 생일이 뭐 중요한가? 나한테는 그냥 365일 중 하루일 뿐이야.”
“나 사실 궁금한 게 있었는데. 아까 약속 때문에 급하게 나오느라고 시간이 없어서 미처 못 물어봤어.”
“궁금한 게 뭔데?”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 어떤 일 하는 지도 못 물어봐서.. 궁금했는데 말이지.”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 한 거야?”
“응.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건데. 왜 전화로 물어보면 안 되는 거야?”
“당연히 물어봐도 되지. 난 갑자기 전화가 와서 뭔가 급한 일이 있나 싶었지. 나 바이오테크 기업에 다니는 거 알고 있어?”
“그건 알고 있지. 거기서 어떤 일 해?”
“나는 의료 진단 AI 시스템을 개발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
“AI가 질병을 진단하는 거야?”
“응, 그런 거야. 병을 검사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잖아. 유전자 검사, 항원항체 반응 검사, 조직 검사, CT, X-Ray 같은 영상 검사. 이런 검사 결과 데이터를 분석해서 질병을 진단하는 AI를 개발하는 부서야. 나는 수집한 데이터를 토대로 분석하고 진단까지 내리는 AI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어.”
“양성, 음성 정도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질병 진단에는 고도의 전문성과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잖아. 그걸 AI가 할 수 있나?”
“당연히 병을 진단하는 건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이지. 회사에서는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먼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것 같아. 의사도 잘못된 판단으로 오진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언젠가 AI가 더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되고, 세상은 그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나 봐.”
“당장의 이익보다 언제 열릴지 모를 미래를 준비하는 거네. 대기업이니까 가능한 개발 같은데? 법적인 문제도 많을 텐데 말이지.”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 나는 그냥 빅데이터 기반으로 분석하는 툴을 만들고 있을 뿐이야. 의학적인 거나 법적인 거는 잘 몰라. 내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야.”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
“아무래도 내가 모르던 분야도 공부를 하면서 해야 하니까 처음에는 어려운 게 많았지. 그래도 계속하다 보니까 많이 익숙해지더라고.”
“그런데 나는 질병 검사랑 진단까지 AI에게 받고 싶지는 않아. 너무 기계적이잖아. 사람은 아프면 따뜻함을 더 원하게 되는데 말이지.”
“맞아. 인공지능이 따뜻함까지 줄 수는 없을 테니까. 매우 중요한 문제야. 개발에 참여하고 있지만, 나도 이게 현실적으로 실현이 될지는 의문이야.”
“그럼 궁금한 게 정신질환이나 심리상태도 AI가 진단 할 수 있나?”
“글쎄. 그거는 모르겠어. 우리 회사에서 그런 걸 개발하고 있지는 않아.”
“지금 막 생각났는데 미래에는 피 검사 같은 걸 해서 정신 질환이나 심리 상태를 진단 할 수 있지 않을까?”
“하하 수겸아, 너 의외로 엉뚱한 생각도 하는구나.”
“우리 감정이나 기분도 다 화학작용이라고 하잖아. 그러면 언젠가는 가능할 것도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음.. 글쎄 모르겠네.”
“만약에 그런 검사가 있다면 난 한 번 해보고 싶어.”
“정말? 난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나의 심리적인 문제까지 AI가 판단해준다면 왠지 삶이 너무 서글플 것 같아.”
“그렇긴 해도 내가 내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잖아.”
“뭐.. 그럴 때 많지.”
“내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미래에는 그런 것도 알 수 있겠지?”
“글쎄. 그런 검사가 개발될지는 모르겠네. 그런데 그걸 굳이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지금 네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모르는 거야? 꼭 검사를 해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거라면 솔직함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면 되지 않을까?”
“너 쇼핑몰에서 만났을 때는 이런 얘기 안 했잖아. 남자친구가 사람이 좋고 돈 많으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했잖아. 낮에 한 얘기랑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은데? ”
“아까는 사랑에 대해서 얘기한 게 아니라,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얘기했었잖아.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건 지극히 비즈니스적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비즈니스 차원에서 설명이 안 되는 현실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장 좋은데 그러기 쉽지 않은 세상이니까 그렇지.”
“그러게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지는 않았네. 그래도 환상적인 마무리를 할 때의 새로운 만남은 사랑 아닌가?”
민구가 잠시 생각하다 말한다. “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누군가와 연애를 하거나 결혼할 때 사랑 없이 필요에 의해서 할 수도 있으니까. 사랑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거 같아.”
“그래, 사랑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래도 관계는 비즈니스이고, 사랑은 비즈니스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건가? 네가 하는 말 뭔가 좀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아.”
“그런가?”
“응. 그래 보여. 관계를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는 거 혹시 다시 상처 받기 두려워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아닐까?”
“뭐.. 그럴 수도..” 민구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네 의견은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는 거라면 이런저런 생각 많이 할 필요 없이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면 된다는 거지?”
“응.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사실 나 저녁에 남자친구 만나서 헤어지자고 말했어.”
민구는 수겸의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랜다. “아니 왜? 낮에 얘기 들어보니까 남자친구 좋은 사람 같던데.”
“내가 얘기했잖아. 같이 있으면 별로 재미없다고.”
“재미가 좀 없다고 헤어지는 건 아니지 않아?”
“그렇긴 한데.. 나 그냥 결심했어.”
“뭘 결심해?”
“내 연애 사업을 환상적으로 마무리하기로.. 판타스틱 엔딩.”
민구가 조금 당황한 투로 말한다. “판타스틱 엔딩?”
“응 네가 말했잖아. 환상적인 마무리를 할 수 있으면 좋은 거라고. 그래서 지금 네 와이프도 다 이해한다며?”
“응. 그렇게 말하긴 했지.”
“어쨌든 그건 그렇게 됐으니까 더 이상 묻지마. 그나저나 민구야, 너 이번 주말에 뭐해?”
“이번 주말? 아무 계획 없는데.”
“그래? 잘 됐다. 나는 이번 주 토요일에는 화보촬영이 있어서 시간이 안 되거든. 일요일에 같이 영화 보러 가자.”
“영화? 갑자기?”
“뭐가 갑자기야? 내일 보자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 보자고 하는 건데. 이번에는 미리 얘기하는 거니까 너 거절하면 안 된다. 무조건 나랑 같이 봐야 돼. 알았지?”
“그그그.. 그래. 영화 좋지.”
이제서야 민구는 연애사업을 환상적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수겸이의 말이 이해가 된다.
“내가 영화 예매해서 연락할게. 일요일에 볼 영화는 내 마음대로 고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래 알았어.”
“그럼 전화 끊을게. 잘자고 내일 출근 잘 하고.”
“그래 너도 자알..”
수겸이 갑자기 민구의 말을 끊는다. “아 참, 그리고 너 일요일에 만날 때 오늘 산 흰색 셔츠 입고 와.”
“흰색 셔츠?”
“응, 그냥 그거 입고 와. 나도 하얀색 옷 입을 거니까. 알았지?”
“그래 알았어.”
“진짜 끊는다. 안녕.”
“그래 안녕.”
민구는 전화를 끊었고 머릿속이 멍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판타스틱 엔딩이 찾아왔다.
민구는 토요일에 소송 중인 아내를 만나 재산을 자신이 6, 아내가 4로 나누기로 최종 합의했고 위자료 소송도 취하하기로 결정했다.
일요일이 되었다. 수겸과 민구는 영화관 근처 작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수겸은 가슴에 파란색 큰 하트가 그려진 흰색 니트를 입었다. 민구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 거의 다 와간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린다. 민구는 이미 도착해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수겸도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 유리창 너머 흰색 셔츠를 입고 있는 민구가 보인다. 햇살은 사선으로 유리창을 뚫고 들어가 민구가 앉아있는 자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민구도 밖을 둘러보다 카페 입구로 걸어오는 수겸을 발견했다. 민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겸에게 반가운 손짓을 한다. 수겸은 걸음을 멈추었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민구와 마주본다. 카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민구와 겹쳐 보인다. 민구 가슴에도 파란색 하트가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