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호는 영화감독이다. 25살 이라는 매우 이른 나이에 입봉하였고 10년동안 영화 세 편을 연출했다. 첫 작품을 제외한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은 흥행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다. 두 편 모두 큰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가 아니어서 관객이 아주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투자자와 제작자 모두 흥행 실적에 만족했다. 대중성도 있으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과 개성이 담긴 작품을 일관되게 연출하다 보니 태호의 영화를 열렬히 지지하는 소수의 팬도 생겼다. 세 번째 작품은 해외 유수 영화제에 재능 있는 젊은 감독의 작품을 소개하는 섹션에 초대받기까지 했다. 이런 크고 작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세 편 모두 국내 평단으로부터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중간 중간 흐름이 끊기고 이해하기 힘든 혹은 불필요한 장면이 나온다는 평이 많았다. 그나마 세 번째 영화가 해외영화제에서 국내와는 상반되게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 태호에게 큰 위안이 됐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지인랑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평론가만이 태호의 영화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평이야 어찌됐든 영화감독이 다음 작품의 연출 가능 여부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인은 아무래도 흥행일 것이다. 적은 예산 안에서 효율적으로 연출해 흥행 성과까지 낸 태호가 네 번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투자 받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태호는 지금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 이유는 바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태호는 1년째 노트북 앞에 앉아서 시나리오를 한 페이지 이상 쓰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흥행도 크게 성공하고 평단에서도 좋은 평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유수 해외영화제 공식경쟁부분에 초청받고 수상까지 하는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 시나리오 3분의 1을 썼다가, 또 거의 반 정도 분량을 썼다가 전부 삭제하기를 수 차례 반복했다.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다. 창의성이 다 고갈 된 건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고 있다. 오히려 고민을 하면 할수록 뇌가 녹아 내리는 것 같고 그나마 희미하게 떠다니는 아이디어마저 눅눅하게 문드러져 쓸모 없이 돼버린다. 이런 시간이 지속되면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도 함께 녹아내려 사라지는 건 아닌지 너무 무섭다. 극심한 우울감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고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다. 태호는 술 없이 하루를 버티기 힘들다.
태호는 오늘도 노트북 앞에 앉아 괴로워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고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갑자기 편두통이 온다. 잠시 머리를 식히는 편이 나을 듯하다. 태호는 부엌으로 가 와인셀러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고 잔도 챙겨 다시 서재로 왔다.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태호는 발신자를 확인한다. 자신의 첫 번째, 두 번째 영화에 출연한 배우 강혜지이다. 20살에 태호의 첫 번째 영화로 데뷔한 혜지는 최근에 출연했던 두 편의 영화가 성공하면서 주연급 인기 배우로 성장했다. 태호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혜지구나. 오랜만이네.”
“네 저 혜지에요. 감독님, 오랜만에 연락 드리네요. 잘 지내시죠?”
“그럼, 잘 지내고 있지. 지난 번에 개봉한 영화 잘 봤어. 연기가 더 좋아졌더라. 감정을 절제하고 묵직하게 안으로 눌러주는 연기도 잘 하던데? 연기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 나는 밖으로 막 폭발하는 연기보다 그렇게 절제하면서 미묘한 감정 연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거든. 아주 미세한 근육까지 써가면서 표현하는 감정선이 너무너무 좋더라고.”
“정말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께 칭찬 받으니까 너무 좋아요. 하하. 아무것도 모를 때 감독님께서 저 캐스팅해주시고 촬영 때 연기 지도도 잘 해주신 덕분이죠. 운 좋게 첫 작품을 감독님하고 하게 되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하. 혜지야, 너 너무 기계적으로 좋은 말만 하는 거 아니야?”
태호는 안 풀리는 시나리오를 붙잡고 시름만 하다가 오랜만에 혜지랑 얘기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헉! 감독님, 티 많이 났어요? 사실 뭐..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 것도 없진 않죠. 배우 입장에서 감독님한테 잘 보여야 하잖아요. 하하. 아니에요. 정말 감독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혜지는 여유 있게 태호의 농담을 받아 쳤다.
“내 덕분은.. 다 네가 잘 한 거지. 나도 첫 작품부터 너랑 하게 돼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어떻게 지내시나 안부차 연락 드렸어요. 뭐.. 좀 궁금한 것도 있고요.”
“궁금한 거? 뭔데?”
“다름이 아니라 감독님 차기작 준비 어떻게 돼가나 싶어서요. 제가 몇 년 동안 쉼 없이 일을 많이 해서 1년정도 쉴까 하는데요. 쉬고 난 다음에 감독님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서요. 감독님이랑 마지막으로 작업한지 꽤 오래 되기도 했잖아요. 제가 출연할만한 배역이 있을까요? 지난번 감독님 작품이 해외영화제에 초청 받은 거 보고 제가 스케줄이 안 맞아서 그 작품에 출연 못했던 게 얼마나 아쉬웠다고요.”
“그랬었구나. 혜지가 출연한다면 나야 언제나 환영이지. 그런데 아직 시나리오도 쓰지 못하고 있어.”
“그래요? 저한테 시나리오 쓰고 있다고 말씀하신 게 꽤 오래 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마음에 안 들어서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어.”
“아, 그래요?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이 크신가 봐요?”
“맞아. 부담감이 커. 그래서 그런지 아이디어도 잘 안 떠오르고 생각난다 해도 하나도 마음에 안 들어. 1년 동안 한 자도 못 썼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
“그러시구나. 요즘 슬럼프에 빠지셨나 봐요?”
“슬럼프 정도가 아니야. 깊은 늪에 빠져서 탈출하려고 계속 발버둥치는데 몸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그런 상황이야. 요즘은 내가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어. 정말 너무 무기력하고 자신감은 완전히 바닥이야.”
“감독님, 많이 지치셨나 보네요. 저한테 윤태호 감독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자신감과 열정이거든요. 촬영 때 감독님이 더 좋은 장면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한 숏 한 숏 혼을 다해 찍는 그 열정적인 모습이 지금도 제 눈에 선해요. 원래 감독님 모습으로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에요.”
“그랬었나? 그랬던 내 모습이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휴우~” 태호가 길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전화기 너머 혜지가 말을 하다 잠시 망설이는 게 느껴진다. “저.. 감독님,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자신감을 올려주는 병원이 있거든요. 소개시켜드릴까요?”
태호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뭐라고? 자신감을 올려주는 병원이라고 했어?”
“네. 자신감을 올려주는 병원이요.”
“그런 병원이 있어?”
“네, 있어요. 그 병원에서 약을 처방해주는데요. 그 약을 먹으면 자신감이 올라가요.”
“에이.. 혜지야, 내가 지금 많이 힘들어하니까 기분 전환시켜 주려고 농담하는 거지? 그런다고 될 문제가 아니야. 나 정말로 심각하단 말이야.”
“감독님, 저 지금 진지하게 말씀 드리는 거에요. 농담도 아니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에요. 진짜 그런 병원이 있어요.”
“에이.. 왜 그래? 뭐.. 이상한 종교 단체에서 하는 그런 건가? 사기꾼 아니야?”
“감독님,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저 믿어주세요. 아주 용한 의사 선생님이세요. 저도 큰 효과를 봤어요. 저도 연기가 너무 안되고 자신감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을 때가 있었거든요. 촬영장 가기가 너무너무 두려웠고요. 얼마나 심각했으면 당시 하고 있던 작품을 마지막으로 연기를 그만두려고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약을 먹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자신감이 올라오고 제 자신을 믿을 수 있으니까 제가 가진 능력의 120프로를 발휘하게 되더라고요. 그 이후로 연기 잘 한다는 평가도 많이 받았고 연기하는 것도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감독님, 저 믿고 꼭 그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그 병원에서 자신감을 올리는 약을 처방해준다는 거지?” 태호는 다시 한 번 의심하듯이 물었다.
“네, 그렇다니까요. 진짜에요.”
“혜지야, 나는 약의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무리 힘들어도 약은.. 좀 그런데. 혹시 너 중독..”
혜지가 태호의 말을 끊는다. “감독님! 절대 그런 약이 아니에요. 저 믿어주세요. 향정신성 약품이나 환각제 같은 그런 약이 아니에요. 중독성도 없어요. 저는 6개월 정도 복용하고 바로 중단했어요.”
“저.. 정말이야? 그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약을 먹으면 자신감이 회복된다는 말이지?”
혜지가 사실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니까 태호는 혜지의 말에 솔깃해졌다.
“그렇다니까요. 감독님, 저 믿고 일단 병원에 방문해 보세요. 저에 대해서 감독님이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제가 이상한 거에 빠지거나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맞다. 혜지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태호는 어느새 혜지에게 설득됐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