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에 대하여-인사성
시리도록 무표정한 군중들은 각자의 스마트폰 액정만 쳐다보다가도, 열차가 한강 위를 지날 때만큼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경치를 바라본다. 그들의 눈빛에 잠시 감수성이 서린다. 그 순간만큼은 제각각의 군중에서 벗어나 명화를 감상하는 단체관람객이 된다. 그럴 때면 역시 인간이란 도파민보다 세로토닌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깨닫곤 한다. 나 역시 한강을 바라보며 세로토닌을 충전한다. 평상시 지하철 창은 마치 300호짜리 액자 같다. 잘 어우러진 계절을 화폭에 담아 일시에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명화.
열차는 지금 장마를 지나고 있다. 정장바지가 땀에 젖어 허벅지에 찰싹하고 달라붙는 것 외에도 이맘쯤이면 달라지는 것이 하나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부연 흙빛 강물과 한껏 불어난 수위가 바로 그것이다. 장마로 물이 불어났을 때에서야 비로소 강물은 액자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한강은 그 자체로 한강인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실개천에서 물이 흘러들어와 유지되는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모든 생명이 그렇게 각자의 근원을 두고 마련되는 것이다. 그럼 과연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 근원은 무엇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내게 흘러든 수많은 실개천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 본다. 어느 개천이 최초인지 그 순서는 그다지 중요치 않을 것 같다. 어차피 하나같이 나를 이룬 근원이니까. 우선은 20살의 내가 보인다. 삼성호텔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소년도 청년도 아닌 한 철부지가.
대학교 1학년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나는 삼성호텔에서 2달간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호텔이니만큼 에어컨 바람을 쐬며 조금은 편하게 돈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첫 출근날, 프런트에 알바를 하러 온 내 또래 아이들이 드문드문 서있었다. 곧이어 40대는 되어 보이는 매니저급의 여직원이 나와서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며 분류하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이 한 줄, 그리고 나머지 10여 명의 인원이 반대편에 한 줄. 반대편의 아이들은 하우스키핑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호텔 알바는 바로 그쪽이었다. 반면에 내가 속한 줄은 어디었는가하면, 시설팀이었다.
시설팀은 호텔 지하에 위치했다. 그곳의 한 벽면은 30개 정도의 cctv화면으로 꽉 차있었고, 정수기 옆엔 늘 믹스커피 250개짜리 박스가, 그리고 반대편엔 각종 공구와 전구, 퓨즈박스 등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지하층 특유의 퀘퀘한 냄새, 맞은편 린넨실에서 풍겨오는 스팀냄새, 오로지 남자로만 구성된 13명의 시설팀 직원들 몸에서 뿜어져 나온 땀냄새, 그리고 공구의 녹냄새들이 한 데 어우러져 나의 코를 자극하는 곳이었다.
시설팀 직원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었다. 20살의 철부지 삼총사에게 윽박을 지른다거나 짓궂은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젠틀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이 몸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풍기는 진한 사람냄새이자, 위선을 덜어낸 순박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직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그들 모두를 ‘행님’이라 불렀다. 그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있어 아직도 뚜렷이 기억이 난다. 날더러 갑자기 사위라고 부르던 행님도 있었고, 미필인 우리에게 ‘공이’가 무엇인지 열성 있게 교육하던 해병대 출신 행님, 눈이 나빠 공익을 나왔지만 근육이 남산만했던 행님 등… 가식 없는 그들을 우리 삼총사는 열심히 따랐다.
주로 하던 업무는 방 전구가 나가거나, 세면대가 막히거나했을 때 공구를 챙겨 행님들을 돕는, 시쳇말로 ‘시다’였다. 우리는 때때로 찢어져 각자 배속된 행님을 돕기도 하고, 썬베드를 거둘 시간이 되면 뭉쳐서 수다를 떨며 일하곤 했다. 셋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해서, 고현만의 해안도로를 달리며 지친 하루를 바닷바람에 날려 보내곤 했다.
우리의 마지막 출근날, 오후 네시쯤 되었을 때였다. 일을 한창 돕던 와중 사무실에 돌아가라는 명령에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멀뚱히 서있었다. 그러더니 마이콜을 닮은 행님이 “파인애플을 마이 무야 된다. 파인애플이 제일 비싸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아무튼간에 사무실로 이동한 우리는 다른 형님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호텔 지배인이 알바생들에게 디너 뷔페를 먹이라고 한 것이었다.
거제의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호텔 가든에서 우리는 매니저 한 명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마지막 날이라고 이런 호강도 시켜주고 참 좋은 호텔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이번 방학 알바생이 열댓 명 정도 되는데, 너희 셋만 사주는 거다. 이유가 뭔지 아나?” 아리송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는 삼총사.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지배인님이 직원들한테 ‘이번 알바생들 중에 누가 제일 잘합니까’ 물었는데, 하나같이 시설팀 알바 셋이라 캤다대.” 우리는 “저희가요?”하고 반문했다. 시설팀 형님들이야 우리를 예뻐했겠지만, 다른 팀 직원들이 우리를 추천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 특히 미화팀 아지매들이 그렇게 칭찬을 열심히 했다카던데. 모르는 사람한테도 인사 척척 잘하고 늘 웃고 댕긴다고." 순간 직원들을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십니까!'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던, 흐르는 땀을 목장갑으로 닦아 이마에 실밥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우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사회라는 곳이, 실은 관심 없는 것 같이 보여도 아랫사람을 여러 각도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너네가 이번에 한 것처럼, 열심히 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분명히 보상해 줄 거다." 우리는 파인애플을 담아 온 접시에 포크를 잠시 올려두고 '좋은 말씀 새겨듣겠습니다'라는 눈빛으로 보답하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사실 알바생한테 식사권을 주는 건 흔한 일이 아이다. 알제? 너네가 잘했다고, 오늘 일을 잊지 말고 앞으로도 잘 살아가라는 뜻에서 어른들이 마련해 준 거니까, 충분히 자랑스럽게들 생각하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가라." 그렇게 말하는 매니저는 이 말을 해주기 위해 속으로 몇 번씩 연습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날 우리의 배를 가득 채운 것은 스테이크나 아스파라거스, 파인애플 따위가 아닌 바로 뿌듯함이었다. 당연하게 여겼던 '인사'가 가져온 뜻밖의 보상. 그것은 부족함 많던 삼총사를 예쁘게 봐준 시설팀 행님들과, 마냥 귀엽게 봐준 미화팀 아주머니들, 생각이 깊은 지배인과 매니저 모두가 힘써준 덕분임을 잘 안다. 이후로도 나는 인사만큼은 잘하려 애쓰고 있다. 삼총사였던 C군과 P군도 마찬가지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