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점장의 “넌 원래 그런 놈이니까.”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을 뿐이었다. 점장은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는 되다 만 조폭처럼 생겼는데, 작은 키에 술배가 조금 나오고 스프레이를 뿌려서 짧은 머리를 꾹 누른 게 특유의 스타일이었다. 점장은 돌이 채 지나지 않은 딸이 있음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매니저 형을 이끌고 여자가 술을 따라주는 그런 술집엘 갔다. 다음날이면 매니저 형에게 2차를 갔던 여자가 어땠는지 설명하는 질 나쁜 인간이었다. 매상이 저조한 날이면 괜히 직원들에게 짜증을 내고, 회식은 어찌나 좋아하는지 한 주 걸러 하루씩 회식을 잡았다.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몇 번 불참했었다.
내가 관두는 날에도 어김없이 회식 제안이 들어왔다. 나는 적당히 둘러대어 다음에 참석하겠다고 했지만, 점장은 안 봐도 뻔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넌 원래 그런 놈이니까.”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내게 적당히 화낼 수 있을 만한 건덕지였다. 더 이상 지저분한 놈과 일하기 싫다는 생각에 짐을 챙기고, 회식 자리에서 뵙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와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이런 식으로 끝내는 건 진짜 아니다’, ‘없던 일로 할 테니 출근해라’ 등 취한 상태로 보낸 듯한 메시지가 여러 개 와있었다. 평소 성실하고 대답도 잘하던 내가 말 한마디 없이 도망한 것이 그에게는 꽤나 큰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다음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말없이 도망친 형이 있었다. 신발매장을 관두고 들어간 아울렛 매장의 창고팀은 옷이 담긴 박스가 켜켜이 쌓인 어둑한 지하창고에 위치했다. 그곳에서 창고장 C형과 정직원 H형, 알바생인 나, 셋이서 몸을 쓰며 일했다. 신규제품이 들어오면 박스째로 창고 빈자리에 옮기고, 그것을 하나씩 까서 옷걸이에 진열하는 까대기 작업, 틈이 나면 창고 재고를 파악하고 상자 정리를 하는 등의 일이 주된 업무였다.
어느 날 H형이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나 내일부터 안 나올 거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왜냐고 묻는 내게 그는 “그냥, 힘들어서 관둘라고.”라며 이유를 일축했다. C형은 알고 있냐고 물었을 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모른 체 해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 그럼 충전기 챙겨가세요.” 그는 하마터면 소중한 걸 놓고 갈 뻔한 것처럼 히죽 웃으며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하회탈 같은 밝은 눈웃음이었다.
다음날, 직원들 모두 모인 식사자리에서 그의 결근이 화제였다. C형은 그의 소지품이 사라진 것을 보고 단순결근이 아님을 직감했다. 평소 버럭거리던 양복담당의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골프복담당 아주머니를 손가락질하며 “그러게 자꾸 H를 부려먹으니까 힘들어서 애가 도망간 거 아냐!”하고 성을 냈다. 모두가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인 채 식사를 했다. 도망했음에도 그의 흠결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H형의 평소 행실이 바랐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유일한 H형의 공범인 것이 죄송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떠난 빈자리도 과연 이랬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도망칠 당시에는 남겨질 사람들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스쳐가는 수많은 인연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관계를 가벼이 여긴 탓도 있다. 때마침 도망친 H형이 남겨진 사람들의 표정을 볼 기회를 남기고 갔다. 자신이 도망친 이유가 아니기를 바라는 죄책감, 한편으론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난 그의 행동에서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되었나'하며 느껴지는 섭섭함. 그것은 꽤나 우울한 일이었다. 그제서야 도망을 결심한 당일, 머리를 혼자서 자른다는 내게 선뜻 미용가위를 가져다주겠다며 '우린 친구니까.'라고 했던 동료가 생각이 났다. 언질이라도 남겨주고 떠날 걸 하며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관계라는 것은 꼭 공유일기 같다. 함께 써 내려가다 어느 틈에 쓰기를 멈추고, 잊혀졌다 한 번씩 펼쳐보게 만드는. 내게는 지금껏 만난 사람의 수만큼 공유일기가 존재한다. 그중 어떤 일기는 불현듯 떠올라 펼쳐보고 싶게 만들지만, 어떤 일기는 물을 잔뜩 먹어 페이지가 엉겨 붙은 책처럼 펼치기도 싫어진다. 도망한 관계가 늘 그렇다. 이별은 만남의 수만큼 존재한다. 앞으로 만날 사람의 수만큼 이별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두가 좋은 사람으로 남길 기대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책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