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배움 공책에 싸인을 해달라고 가져왔다. 배움 공책은 과목별로 중요한 내용을 필기하는 공책이다. 싸인을 하려고 보니 앞에 싸인이 되어 있는데 나의 필체가 아니다. 내 싸인이긴 한데 내가 한 것은 분명 아니다.
"이 싸인... 엄마가 한 거 아닌 거 같은데, 네가 했니?"
아이는 입을 옴짝달싹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배움 공책을 집에 안 갖고 와서 엄마 싸인을 못 받아가지고... 어쩔 수 없이 제가 했어요. 죄송해요."
앞을 넘겨보니 처음엔 어설펐던 싸인이 뒤로 갈수록 그럴 싸하다. 내가 한 싸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솔직히 아이한테 화가 나기보다 아이가 그런 임기응변이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다음번엔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초등학교 때 일이 생각난다. 시험 성적을 보여주고 부모 싸인을 받아와야 했다. 나는 95점인지 90점인지 하여간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부모님께 못 보여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하교 후 책가방을 던져놓고 열어보지도 않은 채 다음 날 등교를 했기 때문에 나는 시험지에 엄마의 싸인을 받아가지 못했다.
"싸인 다들 받아왔지? 검사하게 책상에 펼쳐 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시험지를 꺼냈다. 내 짝꿍도 싸인을 못 받아왔다.
"어떡해?"
"어쩔 수 없지. 내가 그냥 해야겠다. 너도 빨리 네가 해."
짝꿍은 자연스럽게 싸인을 했다. 나도 안절부절 못 하다가 싸인을 했다. 엄마의 성을 흘려 쓰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선생님이 시험지의 싸인을 검사하다가 내 앞에 딱 섰다.
"이거 네가 했지? 앞으로 나가!"
부모 싸인을 위조한 나와 싸인을 못 받은 아이들은 앞으로 나간 다음 손바닥을 맞았다. 내 짝꿍은 다행히 걸리지 않았다. 그 친구에게는 다행이었지만 나에게는 불행이었다. 같이 걸렸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누구는 넘어가고 누구는 재수 없게 걸리니 억울하게 느껴졌다.
쉬는 시간이 되어 짝꿍이 내 위조 싸인에 대해 분석했다.
"야! 어른 글씨처럼 작게 흘려 썼어야지. 너는 너무 크게 쓰고 누가 봐도 애가 쓴 글씨다."
그 말을 듣고 짝꿍이 한 싸인을 보니 영문을 흘려서 그럴 싸하게 해 놨다. 얼핏 보면 어른이 한 싸인 같았다. 굳이 한글로 싸인하겠다고 커다랗게 엄마 성을 써놓은 내 글씨와 확연히 달랐다.
에효, 나쁜 짓도 담이 크고 요령이 있어야 하지. 나는 나의 미련함을 탓하며 엄마의 싸인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작게, 흘려서, 최대한 엄마 싸인처럼. 그러나 데뷔전에서 호되게 당한 나는 그 이후에 엄마의 싸인을 위조할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