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유치원생이었던 큰 아이는 '세대주님께'로 시작하는 어버이날 카드를 써줘서 큰 웃음을 주었다.
"너 세대주가 뭔지 알아?"
"아뇨? 근데 관리비 영수증에 '세대주님께'라고 쓰여있던데요?"
내가 어릴 적에 학교에서 어버이날 카드를 쓸 때 어떤 내용을 쓸지 매우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 아빠께'라고 쓰면 아빠가 속상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빠 엄마께'로 쓰면 엄마가 속상할 텐데.
결국 '부모님께'라고 썼던 것 같다. 그래 봤자 '부모'가 '아버지와 어머니'란 뜻이지만 상용화된 문구는 내가 어떻게 뒤집을 수 없으니까.
감사하다고도 하고 더 잘하지 못해 죄송하다고도 하고 매년 감사 편지와 반성문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옆 친구들을 보면 휘릭 대강 쓰고 노는데 나는 왜 수업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까지도 앉아서 카드를 쓰고 있는 건지 괴로웠다. 결국 '매년 이런 걸 왜 의무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되어 아이들이 써 온 카드를 받고 보니 의무든 억지로든 간에 그렇게라도 받은 카드에 기분이 좋다. 어버이날의 제정 이유가 보인다. 평상시에 부모님께 잘하는 게 맞지만 그게 잘 안 되면 1년에 한 번이라도 기억하고 챙기라는 의미겠지.
올해 큰 아이가 써준 카드도 재미있다.
약 9년 5개월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 멋진 부모님이 되어 주세요.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잘하겠다는 게 아니고 우리보고 더 멋진 부모가 되어 달란다.
한참을 웃고 보니 내가 부모님께 드린 카드도 맥락이 비슷하다.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계셔 주세요.
내가 부모님께 잘하겠다는 내용은 없다. 부모님한테 바라는 내용만 있다.
아직 철이 없는 딸이다. 그래도 진심이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곁에만 계셔 주셨으면 좋겠다고.
큰 아이가 왜 자기 허락도 안 받고 자기 카드 문구를 올렸냐고 항의할까 봐 공평하게 작은 아이 카드도 공개한다.
저희가 풀빌라에 가고 싶을 때도 데려가 주시고 우리가 먹고 싶은 게 생겼을 때 그 음식을 만들어 주셔서 부모님의 사랑을 느꼈어요. 엄마아빠 사랑해요♡
작은 아이 규가 접어준 카네이션
아이가 원하는 걸 부모가 해줬을 때 부모의 사랑을 느꼈다고 하니 다소 얄팍한 사랑 같긴 하지만, 앞으로도 아이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주고 풀빌라 펜션에 데려가 주는 '멋진 부모'가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