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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Oct 17. 2022

내가 화난 이유

동네 상가에 작은 어묵 가게가 있다.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이 끝나면 거기서 꼬치 어묵이나 컵 떡볶이를 사 먹는다. 바(bar)처럼 한 줄로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예닐곱 개 남짓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 서서 후딱 먹고 가는 곳이다.


예전에 어떤 엄마와 아이가 자리에 앉아 꼬치 어묵을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이가 실수로 어묵 국물을 쏟아서 좁은 테이블과 바닥에 흥건하게 국물이 흘렀다. 엄마는 "야!!!"라며 아이에게 화를 내면서 테이블을 닦았고 가게 사장님은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하며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아이는 화난 엄마를 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아이가 안쓰러웠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로 국물을 쏟은 건데 저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어서 마음이 아렸다.



작은아이의 친구가 2학기가 되면서 전학을 갔다. 작은아이가 전학 간 친구를 많이 그리워하던 참에 마침 그 친구가 우리 아파트에 올 일이 있어서 함께 놀았다. 우리 아이 둘, 친구 남매 둘 총 넷이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시간을 뛰어놀았지만 아이들은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친구 남매가 간 후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문구점에 갔다. 그동안 포켓몬 앨범에 포켓몬 카드를 잘 끼워 모아두었는데 집안에서 없어졌다고 한다. 이번엔 잘 간수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포켓몬 카드와 포켓몬 앨범을 사줬다.


기분 좋게 쇼핑을 하고 상가 어묵 가게에 갔다. 여기서 떡볶이와 꼬치 어묵으로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아이들은 포켓몬 카드를 까 보았다.

"에이, 별로 좋은 거 안 나왔네."

아이들은 좋은 카드가 안 나왔다며 다소 실망하였다. 그사이 음식이 나왔다.

"얘들아, 포켓몬 카드는 그만 보고 이제 먹자."


큰아이가 말을 걸어서 오른쪽을 보고 있었는데 내 왼쪽에 앉은 작은아이가 팔꿈치로 어묵 그릇을 쳐서 어묵 국물을 확 쏟았다. 옆을 보니 아이가 포켓몬 앨범에 카드를 집어넣다가 팔꿈치로 꼬치 어묵이 든 그릇을 건드렸던 것이다. 다행히 국물이 뜨겁지 않았고 아이들 쪽으로 쏟아지지 않았지만, 내가 메고 있던 크로스백 가방 안에 국물이 흥건하게 들어왔다. 가방 안에 넣어둔 핸드폰은 어묵 국물에 절여지다시피 했고 나의 바지도 젖었다.


"야!!!"

나는 예전에 본 그 엄마와 똑같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와, 이게 이렇구나. 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실수란 걸 아는데도 화가 나는구나.' 그때 그 아이처럼 내 아이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겠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내 아이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가게 사장님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온화한 미소를 띠며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라며 대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아 주셨다.


가방에 든 물건을 꺼내고 가방을 닦으면서 짜증이 났다. 안 먹고 포켓몬 카드만 만지던 아이도 밉고 포켓몬 카드랑 앨범도 미웠다.

"엄마, 죄송해요."

"그래. 포켓몬 카드는 이 좁은 데서 정리하지 말고 집에 가서 정리해. 이제 먹자."


흥건한 국물을 어느 정도 닦은 후에 자리에 앉았는데 오른쪽에서 뭔가가 흐른다. 이번엔 큰아이가 물을 쏟았다.

"넌 또 왜 그래?"

"몰라요. 쏟아졌어요."

"먹고 수영 가야 하는데 티셔츠가 다 젖어서 어떡해?"

"괜찮아요. 금방 말라요."

"아휴."


이쯤 되니 어묵 가게의 자리가 이상한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바처럼 한 줄로 된 테이블이다 보니 보통은 한 손에 꼬치 어묵을 들고 한 손으로 국물이 든 종이컵을 잡고 먹는데, 이렇게 먹으면 문제가 없다. 문제가 생기는 건 일행을 보겠다고 몸을 돌려서 얘기할 때 혹은 우리 아이처럼 딴짓하느라 몸을 움직일 때 발생한다. 그러니까 국물이나 물을 쏟는 이유는 가게 구조와 아이의 순간의 실수가 결합된 것이다. 아이가 엄청나게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이렇게 분석을 했는데도 화가 난다. 화나는 이유를 알았는데도 왜 화는 나는 것일까? 제3자일 땐 '국물 좀 쏟을 수도 있지.'라며 한없이 관대했던 내가 당사자가 되니 왜 이리 화가 나는 것일까? 내가 국물을 뒤집어써서일까? (충분히 그럴 만하다.)



집에 오자마자 어묵 국물에 절여진 가방을 세탁기에 돌리고 (물빨래 가능한 가방) 내가 화난 이유에 대해 찬찬히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 글을 쓰는 사이 세탁이 다 된 가방을 건조기에 넣었는데 심상치 않은 굉음이 들린다. '웬 둔탁한 소리지? 뭐가 잘못됐나?' 건조기를 중단하고 가방을 꺼냈더니...


가방 안쪽 지퍼에서 현금과 포인트 카드, 신용카드 등이 하나로 뭉쳐진 덩어리가 나온다. 물건을 다 뺀 줄 알았는데 안쪽 물건은 생각을 못했다.

'아휴, 애들이 문제가 아니야! 가 제일로 문제야!!!'


세상에나...

 

너덜너덜해진 포인트 카드를 버리고 종이 쪼가리를 쓸어 담았다. 카드와 현금을 잘 펴서 바닥에 말리고 있자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싶어 웃음이 나왔다. 돈과 카드가 무사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 덧붙임)

지난 토요일에 열 올리며 글을 썼는데,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로 브런치가 먹통이 되면서 글의 절반만 저장됐더라고요. (분노 거리 하나 더 추가됨)

오늘 기억을 되살려 다시 쓰려니 그때 느낌이 안 나네요.

그래도 브런치 모든 글을 날린 건 아니라 다행이에요. 백업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한 줄 요약: 화나는 이유를 알더라도 화는 난다.


대문 이미지 출처: 네이버 블로그(걷고 또 걷는.. 소소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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