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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산 Jun 20. 2024

명분을 지키는 사람이 이긴다, 갈택이어(竭澤而漁)

- 여불위, <여씨춘추(呂氏春秋)> 팔람(八覽) 의상(義賞) 편에서

갈택이어


이번에 너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옛 문장은 갈택이어라는 말이야. 못[澤]을 마르게[竭] 해서[而] 물고기를 잡는다[漁]는 뜻이야. 당연히 물고기는 낚시로 잡아야겠지. 그런데 물고기를 잡겠다고 못의 물을 다 마르게 한다는 거지. 물을 다 마르게 하면 고기야 잡기 쉽겠지만, 그날로 고기잡이는 끝이겠지. 쉽게 일을 하려고 앞날을 망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 말 뒤에는 아주 오랜 세월을 겸손한 자세로 명분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며 끝내 성공을 이룬 진(晉) 나라 문공(文公)의 삶이 담겨 있어. 이제 진 문공의 삶을 통해 미래를 위해 때를 기다리는 힘에 대해 이야기 할까 해. 

진(晉)이라 썼으니 전국 시대 중국을 통일한 진(秦) 나라와 다른 나라야. 지금의 섬서성 쪽에 있던 춘추시대의 나라. 


진 문공의 성은 희(姬), 이름은 중이(重耳)야. 진나라 헌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 헌공에게는 각기 다른 부인에게서 난 네 명의 아들이 후계자 감이었어. 차례대로 신생, 중이, 이오, 해제, 이렇게. 이들이 다 왕위를 물려받을 만한 왕자들이었지. 너희들도 옛날 역사를 봐서 알겠지만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이 많으면 대개 분란(紛亂)이 일어나게 마련이지. 또 대체로 왕은 현재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지. 그 사랑하는 여인은 왕의 여인 중 가장 젊은 여인일 가능성이 높고. 그러니 이외로 왕위 쟁탈전에서 우위에 서는 것은 첫째도, 둘째도 아닌 막내일 때가 많아. 진나라도 그러해서 헌공은 사랑하는 젊은 여희에게서 낳은 막내 해제를 왕으로 앉히고 싶어 했지. 해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첫째 신생이 왕위를 물려받을 태자로 책봉되어 있었음에도 말이야. 


이미 태자가 된 신생을 대신해서 해제를 왕으로 앉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태자 지위를 박탈해야 했지. 그러나 신하들과 백성들의 여론이 따라주지 못해 그리하지 못 했어. 신생의 인품이 훌륭했거든. 상황이 그러하자 헌공은 첫째 신생을 자꾸만 죽는 자리로 몰아갔어. 이를테면 태자를 자꾸 험난한 전쟁터의 대장으로 삼아 보내곤 했어. 참 모진 아버지가 아닐 수 없지. 물론 그 뒤에서 해제의 어머니인 여희가 부추기는 형국이긴 했지만. 신하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러지 마시라고 간언을 하는 데도 헌공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 


그런데도 신생은 사지(死地)에서도 죽지 않고 의연히 태자의 역할을 해냈어. 조바심이 난 왕의 여인 여희는 모략을 꾸몄지. 어느 날 헌공이 사냥을 나갔을 때, 사냥터의 음식을 신생에게 마련하게 했어. 태자는 그래도 명색이 어머니의 말이니 그대로 따라 고기를 마련했어. 여희는 그 안에 몰래 독을 넣어놓았어. 이틀이 지나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헌공이 음식을 먹으려는데 여희가 말리며 말했어. 고기가 먼 곳에서 온 것이니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지. 그런 다음 고기를 옆에 있던 사냥개에게 던져주었어. 그랬더니 개가 바로 거품을 물며 죽어버렸지. 다시 어린 환관에게 먹였더니 그도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어. 여희는 그 자리에서 흐느끼며 헌공에게 고했어. 태자가 자신과 아들 해제를 해치기 위해 왕을 미리 죽이려는 것이라고. 어쩌면 이토록 나쁜 짓을 할 수 있을까? 태자의 인품으로 보면 왕위에 오른다고 동생들을 해칠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권력을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어미의 비뚤어진 모성(母性)이 낳은 비극이었지. 


태자 신생은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소식을 듣고 일단 변방의 성으로 달아났어. 아버지 헌공은 여희의 말을 믿고 태자의 사부를 잡아다 죽였어. 사람들은 이미 여희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러니 사실 헌공도 내막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아마 그런 사정 때문에 신생은 더 이상 변명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이런 일은 언제든 반복될 것이었지. 그래서 신생은 자결하는 길을 택해. 


중이, 달아나다


큰 형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을 본 중이와 이오는 서둘러 달아났어. 아버지와 여희의 칼끝이 자신들을 향할 것이기 때문이었지. 이때부터 두 사람의 길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지. 그 둘의 성격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길이었지. 둘째 중이는 아버지의 칼을 피해 바로 달아나는 길을 택했어. 아버지가 보낸 자객을 만나 소매 끝까지 칼이 미쳤으나 북쪽 적인(狄人)들의 땅으로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어. 셋째 이오는 자기 성읍에서 아버지와 맞싸우면서 버티다가 양나라로 달아났어. 처음부터 중이는 아버지와 맞서는 일을 하지 않았지만 이오는 그렇지 않았던 거야. 중이는 아무리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니라도 아들로서 아버지와 대적하는 일은 명분이 없다고 보았어. 이오는 문제가 있는 아버지라면 싸울 수도 있다고 본 것이고. 명분, 윤리를 바라보는 눈이 크게 달랐지. 


두 공자가 그렇게 달아나자 헌공은 해제를 태자로 삼았어. 헌공이 무리를 해서 어린 해제를 후계자로 삼자 여러 신하와 대부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어. 그나마 헌공이 오래 살았으면 해제가 제대로 왕위를 이어갔을지 몰라. 그러나 헌공은 다른 왕자들을 쫓아낸 직후 그만 세상을 등지게 돼. 그러자 바로 헌공의 장례식장에서 이극과 비정이라는 대부가 난을 일으켜 해제와 여희를 죽이는 반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그리도 아끼던 아들은 그만 아버지가 안장도 되기 전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던 거야. 결국 헌공의 비뚤어진 자식 사랑은 자신도 망치고 자식도 망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어. 


이극과 비정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왕위를 이을 왕자가 둘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은 난을 마무리하기 위해 왕자들과 접촉해 왕위에 오를 것을 타진했지. 이때도 중이와 이오의 태도가 완전히 달랐어. 중이는 배다른 형제지만 동생의 비극을 틈타 왕위에 오르는 것은 도덕적이지 못하다며 거부했어. 그러나 이오는 자기의 뜻을 펼치기 위해 반란 주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래서 헌공 다음의 왕은 셋째 아들 이오가 이어받아 혜공으로 등극했어. 


중이에겐 시련의 세월이 더욱 길어지는 선택이었지. 명분은 얻었지만 삶은 고달파졌어. 혜공은 권력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어. 그래서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준 이극과 비정을 배신자라며 처단해 버렸지. 그러자 나라 안의 여론이 안 좋아졌어. 그리고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성격은 주변 나라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켰어. 특히 서쪽의 진(秦) 나라와는 원수지간이 될 정도로 관계가 나빠졌어. 나라 밖의 여론도 안 좋게 바뀐 거야. 그러자 서서히 혜공의 대안으로 중이를 거론하는 일이 생기게 되지. 혜공이 그 모양을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지. 그는 자객을 보내 중이를 죽이려고 했어. 중이는 따르는 사람들과 서둘러 제나라로 도망했지. 예전엔 아버지의 자객에게 쫓겨났는데 이번에는 동생의 자객에게 쫓기는 꼴을 당하게 되었어. 


떠날 때 이미 중이는 나이 사십이 넘었어. 고대에는 평균 수명이 낮아서 사십이면 벌써 노인 소리 듣던 때였지. 그런 그가 또다시 도망 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평범한 삶은 아니었지. 우여곡절 끝에 제나라에 도착하자 다행히도 제 환공이 후히 예우해주면서 제나라 여인을 아내로 삼아 편히 지낼 수 있게 해주었어. 

앞서 관포지교에서 이야기했던 그 환공 맞아.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인재에 투자할 줄 아는 환공이 성격이 여기서도 나타나지. 


그렇게 오 년이 흐르니 중이는 이제 제나라에서의 삶이 너무나 만족스러웠어.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제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았어. 환공이 죽고 내란이 일어나고 효공이 왕위에 올랐지만 급속히 나라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었어. 더 이상 제나라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 중이를 따라 벌써 수십 년을 함께 한 조최와 구범 등 신하들은 중이에게 떠나자고 했지. 그러자 중이가 말했어. 

“사람이 태어나 이만큼 편안하고 즐거우면 되었지, 왕위가 무슨 소용이요?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니 떠날 수 없소.” 

그러자 보다 못한 제나라 아내가 말했어. 

“한나라의 공자로서 곤궁하여 여기에 오셨지만, 저 선비들은 무슨 죄란 말입니까? 빨리 진 나라로 돌아가서 수고한 신하들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쾌락에 젖어 있으시니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남자로서 그리 큰 뜻이 없으십니까?” 

그러고는 중이를 술 취하게 해서 신하들과 함께 떠나보냈어. 참으로 여장부라고 해야겠지. 중이가 술이 깨보니 이미 일행이 멀리 떠난 후였어. 그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곧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여 다시 망명길에 올랐지. 이렇게 명분을 따르고 싫어도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좇는 것이 중이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었어. 


중이, 돌아가다


진 나라로 돌아가는 길 또한 만만치 않았어. 초나라에 가서 제대로 대접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조나라, 송나라, 정나라를 지날 때 갖은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 그러나 결국 중이는 주변 진(秦)나라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떠난 지 19년 만에, 예순 둘의 나이로 자기 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어. 당시 진(晉)나라에선 동생 혜공이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어가 왕위에 있었으나, 여론은 어느덧 중이에게로 쏠려 있었어. 진(秦) 나라 목공의 도움 속에 내부와 소통한 중이가 왕위에 오르니 이제 문공이라고 불리게 되었어. 


그 시대에 할아버지 중에도 상할아버지였던 문공은 그러나, 온갖 고초를 겪어낸 노련한 지혜와 신하들의 진언을 들을 줄 아는 겸손한 태도, 일을 추진하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진나라를 최강국으로 만들어 나갔어. 나아가 진과 손을 잡고 초나라를 정벌하여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지. 


갈택이어는 바로 초와 전쟁을 벌일 때의 이야기야. 진 문공이 초나라와 성복에서 싸움을 시작할 때, 구범을 불러 물었어. 

“초나라 군대는 많고 우리는 수가 적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구범이 대답했어.

“듣기로 예절을 번다히 추구하는 왕은 품위를 꾸미는 일에 물리지 않고, 전쟁을 자주 하는 왕은 속이는 일에 물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왕께서도 속임수를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공이 구범의 말을 옹계라는 신하에게 전했어. 이에 옹계가 말했지.

“못의 물을 다 퍼내고 고기를 잡으면 고기를 잡기는 쉽겠지요. 그러나 다음 해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을 것입니다. 숲을 태워버리면 사냥하기가 쉽겠지요. 그러나 다음 해에는 사냥할 짐승이 없을 것입니다. 거짓으로 속이는 방법을 쓰면 비록 지금은 이득을 얻을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이득을 얻을 수 없으니 장기적인 책략이 되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말을 다 들어본 문공은 결국 구범의 계략을 받아들여 속임수로써 초나라를 이겼어. 그러나 돌아와 논공행상을 할 때는 옹계를 가장 으뜸의 자리에 놓았어. 주변의 신하들이 모두 놀라 문공에게 간언했지. 

“성복에서의 승리는 구범의 책략 덕분이었는데, 왕께서 그의 책략은 쓰시고 그 책략을 낸 사람을 배려하지 않으시면 아니 될 일입니다.”

신하들의 말을 듣고 문공이 말했지. 

“옹계의 말은 백년 후까지의 이로움을 내다본 것이고, 구범의 계략은 임기응변의 것이오. 어찌 임기응변의 책략을 백 년 후를 내다보는 혜안 앞에 둘 수 있겠소?”

문공의 사람을 쓰는 방식이 이랬어. 실제 행동은 실리에 따라 하지만 포상은 명분을 세우는 방식으로. 사실 구범은 앞에서 봤듯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망명길을 함께 했던 전우(戰友)였어.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그를 더 챙겨주었어야 하겠지만 문공은 명문을 세우면서 자신을 패자, 즉 시대의 리더로 자리잡게 도와주는 사람들을 더 챙겼어. 이렇게 명분을 꼭 쥐면서 일을 해나갔기 때문에 육십 노구에도 불구하고 패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군주가 될 수 있었지. 


그의 삶을 보면 명분을 쌓으면서 일을 하는 것이 결코 느리게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 명분을 잃은 헌공과 해제의 비극, 명분을 무시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인정받지 못한 왕으로 남게 된 이오 혜공의 몰락을 보면 문공의 삶이 더욱 빛나지. 너희도 기억하길 바라. 삶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 명분을 지키고, 늦더라도 완성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생에서 조급함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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