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상은 디지트(숫자) 홀로 설 수 없다.
정보를 담는 반도체의 집적도만으로 디지털화가 완성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정보와 감각은 디지트화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인간의 인지 안으로 들어오려면 필연적으로 인간 감각 체계로 변환(재아날로그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빛으로 구현된 현실 세계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찰칵대는 순간 엄처나게 빠른 속도로 숫자화되었다가 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OLED 화면의 빛으로 재현된다.
아날로그-디지털-아날로그의 전환과정 없이 누릴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란 없다.
지난 모 방송국 다큐에서 VR로 세상을 떠난 아이를 재생하여 아이 잃은 어머니를 만나게 한 일이 있다.
이 다큐를 통해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감각의 문제를 짚지 않을 수 없다.
1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아이는, 안타깝게도 아이를 그리 닮지 않았다.
HMD를 쓰고 아이를 만났던 어머니는 아이가 멀리 있을 때만 얼핏 자기 아이 같았다고 했다.
말은 안 했어도 그 어머니는 많이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나 또한 많이 실망스러웠다.
그걸 해상도, 동작의 자연스러움 등 VR 테크놀로지의 수준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다.
처음부터 엄마는 아이를 한 번만 다시 ‘안아보고’ 싶다고 했다.
안는 감각, 몸이 느끼는 그 촉각, 몸의 온도와, 피부의 부드러움 혹은 푹신함.
거기에 덧붙여지는 아이의 냄새, 아직 덜 자란 몸에서 풍기는 그 냄새.
그것은 아직 디지털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촉각의 정보를 디지트화 한다한들 그것을 우리가 느낄 감각으로 재현할 방법이 없다.
냄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각에 70% 정도 의지한다고 하지만
70% 시각을 만족시킨다고 실재를 실감하는 것은 아니다.
청각, 촉각, 후각 등으로 이루어지는 나머지 30%의 감각이 실감을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하물며 그 70%의 시각도 만족시킬 수 없는 VR의 수준으로
먼저 떠난 아이를 재현하고 엄마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VR, AR 기술이 이런 면에 대답하기엔 이르다.
아직은 VR이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다만 이런 시도를 통해 어느 지점에서 인간을 더 이해해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방향을 잡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덧붙여 너무도 아쉬웠던 것은
VR로 만나는 아이가 제 말만 한다는 것이었다.
디지털 기술의 긍정성은 쌍방향성에 있다.
롤플레잉 게임의 다차원적 이야기 생성 등에서 우리는 그것을 이미 체험하고 있다 .
VR 속 아이는 엄마와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그저 준비된 대사를 던지다 사라졌다.
상호작용이 없는 대면이란, 아이의 사진을 놓고 상상으로 아이와 대화하는 것만도 못한 체험이지 않았을까.
이것은 VR과 인공지능을 결합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작업이겠고
다음에 이런 작업을 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점 같다.
결국 현 단계 디지털 기술의 한계에 부딪친 기획이었다.
많이 아쉬웠다.
https://youtu.be/uflTK8c4w0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