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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Apr 12. 2016

프리랜서 개발자의 계약서 도장 찍는 하루

프리랜싱의 시작, 계약서

아래는 <출퇴근 없는 삶>의 목차이자 시리즈 첫 글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금요일 아침에 침대에 누워 좌우로 뒤척이며 게으름을 피우다, 카카오톡 소리에 몸을 일으켜 세운다.


'보내주신 계약서 확인했습니다. 팀원들과 상의 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럼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카카오톡을 읽는다. 어제 자정을 넘겨 계약서 작성을 마무리해서 이메일로 보냈는데, 시간이 늦어서 카카오톡으로 '이메일 보냈으니 확인하고 연락 주세요.'라고 남겨둔 후였다. 일어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차린다. 이직 준비로 퇴사한 부인님과 함께 여유 있게 아침을 먹고 나니, 다시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왔다. 다른 팀원 한 명이 계약서 내용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나에게 연락해도 되냐고 묻는다. 당연히 된다고 이야기하니, 다른 사람에게서 카카오톡이 온다. 보통 계약을 하면 전화나 이메일로 세부사항을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스타트업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이라 그런지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새롭게 연락을 준 남자 팀원은 계약 해지에 관한 계약서 항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클라이언트가 계약을 중간에 해지할 경우에 개발자가 기존에 작업한 내용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설명을 하니, 여전히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이해는 된 것 같다. 오히려 이렇게 계약 전에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이 나중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부인님과는 오랜만에 상수로 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프리랜서는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일하기 쉽다. 사람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기 때문에, 틈틈이 부인님과 데이트를 하면서 환기를 해줘야 제 정신으로 일을 할 수 있다. 점심을 먹고 근처에서 미리 전달한 견적서를 정식 문서로 꾸미고, 계약서와 함께 출력한다. 클라이언트가 지방에서 산다고 해서, KTX로 올라올 거라 예상하고 어떻게 서울에 올라올 거냐고 물어봤더니 자동차로 올라온다고 한다. 5시 정도에 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점심때 출발하면 괜찮을 것 같지만 자동차로 서울을 다녀오는 게 어지간히 피곤한 일이 아니라서 말리고 싶었지만 학생들이라 서울에 차 타고 와서 놀다가 내려가려나보다 했다. 문서를 다 프린트 하고, 파일에 깔끔하게 넣고 나니 이제 출발한다는 연락이 온다. 조심해서 올라오시라고 카카오톡을 보낸다.


다섯 시에 집 근처 스터디 카페를 예약해두었다. 보통 업체와 계약을 하러 가는 경우라면 업체 사무실에서 계약을 하겠지만, 이렇게 올라오는 경우에는 가능하면 조용한 곳에서 궁금한 점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계약서를 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클라이언트와 거리가 멀면 계약서 2부를 동봉해서 먼저 도장을 찍어서 보내기도 하는데, 굳이 먼 길을 와서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은 차가 많이 막힌다. 거의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나는 그 동안 계약서에 계약인 이름이 잘못 들어가있는 것을 보고 근처에서 새로 출력을 해두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연락 달라는 내 부탁에 클라이언트 2명은 카페에 도착해서 전화를 줬고, 마중을 나갔는데 세련된 장신의 남녀가 들어온다. 남자 분은 190cm 정도 키가 되어보이고, 여자 분도 힐을 신었는데 180cm은 되어 보인다. 보통은 북방계 민족이 키가 크다는데, 왜 남쪽에서 온 이 분들의 키는 왜 이리 큰 것일까. 하지만 의연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개발 과정에 관해서는 클라이언트보다는 내가 훨씬 더 전문가다. 그간 쌓은 경험으로 개발 뿐만 아니라, 서비스 운영 전반에 대한 조언을 주는 것이 클라이언트에게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일이다.


클라이언트가 개발을 원하는 서비스의 분야가 보통 학생이 하기 어려운 분야라는 생각이 들어서 의아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의문이 많이 해소되었다. 벌써 그쪽 분야로 매장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해당 분야에 관련된 지인도 많은 듯 보였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 답게 굉장한 열정이 있었다. 보통 업체와 개발을 진행하다보면, 가끔 굉장히 불필요한 기능을 넣어달라거나 쓸데없는 디테일에 굉장히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실무하는 사람과 기획자가 분리되어있는 경우에는 기획에서 수정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고, 최종 결정권자와 기획자 간의 직급에 차이가 심할 경우에는 말도 안되는 요청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번 클라이언트는 불필요한 기능을 확 걷어내자고 말할 정도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핵심 타겟에 맞춰서 디자인 방향이나 서비스의 특정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고민을 갖고 자기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이 제대로 된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 내가 해야할 일은 기술적인 부분들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고, 클라이언트가 업무를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서비스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2시간이 흘러 있었다. 우리는 도장을 찍었고, 서로에게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계약은 왠지 좋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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