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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Oct 25. 2016

개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

조직에 속하지 않고도 당당히 혼자 설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방학 때 나는 어른이 되었다. 정확히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높은 확률로, 강한 아이로 자라기를 원하셨던 부모님 손에 등 떠밀려 친동생과 부모님끼리 친구인 집의 친구 한 명과 함께 겨울 방학 극기 훈련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배에 탈 때까지만 해도, 이 여행이 그렇게 고되고 힘들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돈을 대신 맡아 주겠다며, 학생들 돈을 모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여행 전의 나는 그들이 이상하다고 확신을 하기에는 너무 순수했다. 오호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람들은 사기 단체였다. 부모로부터 돈을 받아서 중국으로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까지 1달간 중국 내륙 지역을 다니는 일정이었는데, 거의 중국 걸인 여행 수준이었고 이 극기 훈련의 꽃은 백두산 등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올랐던 그 산이 백두산인지 확신도 없다. 아무튼 그 산을 오르다 함께 갔던 친구는 난간도 없는 절벽에 매달려 객사할 뻔했다. 나는 너무도 춥고도 춥던 어느 날 머리를 감고 드라이기가 없어서 제대로 말리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머리카락이 얼어서 부서지는 경험을 했고, 그다음 날 귀가 얼어서 귓불이 딱지가 앉은 것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도대체 알려주질 않으니 어딜 가는지 모르겠는데, 맨날 잘 공간이 부족해서 쪽방에 초등학생 열댓 명이 쪽방에서 새우잠으로 자야 했고, 항상 식사가 부족해서 배가 고팠다. 고물 봉고차를 타고 이동하던 어느 날,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끼니를 거르고 이동 중이었던 거 같은데, 차 안에는 조교급의 대학생 형 1~2명, 고등학생 형들 3~4명, 그리고 나머지는 초등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프로그램 관계자가 와서 식사 대신 과자 봉지 몇 개를 주고 갔는데, 대학생 형부터 그다음 고등학생 형들까지 과자를 먼저 가져가고 나니 뒷자리에 앉아있던 초등학생들은 먹을 게 없었다. 그 대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도 배가 고팠었겠지만, 빈 과자 봉투가 내 손으로 들어오자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아, 세상은 정글이구나.' 1달 동안 단 한 번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30초 집에 전화할 기회가 있었던 그 날, 나는 어린 날 아버지 직장 때문에 이사하느라 친구들과 이별하면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1달이 끝나고 부모님을 만나던 그 날, 부모님은 살아서 돌아온 걸 다행으로 생각하셨고 나는 그런 부모님께 이렇게 이야기했단다. "저 이제 세상의 어두운 면을 봤어요."


이 힘든 극기 훈련 탓이었을까? 잦은 이사에 주눅들 법도 했지만, 더 존재감 있게 친구들 앞에 나서는 걸 택했다. 그와 함께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겁 없던 시절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초였다. 갓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새 교복에 새로운 친구를 만나며 아직은 어색하고, 한편으로 설레던 그런 날이었다. 교문 앞에서 인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같은 반 친구 한 명이랑 마주쳐서 같이 교실로 올라왔는데, 갑자기 모르는 선생님 한 명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러더니 "아까 올라오라고 한 놈 어디 갔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가 했지만, 그냥 아까 같이 올라왔던 친구랑 교실 뒤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를 향해 그 선생님이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 친구를 범인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앞 뒤 사정을 들어보니 그 선생님이 2층 교무실에서 밖을 내려다보니 교복 바지를 지나치게 줄여 입은 학생이 보여서 몇 반인지 물어보며 교무실로 올라오라고 했고, 그 학생이 올라오지 않자 화가 나서 그 학생이 이야기 한 반으로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멀리서 봐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지만 교복을 줄여 입었던 나와 함께 등교한 그 친구를 지목하고 범인으로 몰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와 함께 등교하지 않았나? 그래서 내가 그 선생님에게 다가가서 이야기했다. "저 친구 저랑 같이 등교했고, 그런 일 없었는데요?" 그런데도 그 선생님은 무조건 그 친구가 자기가 봤던 그 애가 맞단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자기 말만 하는 그 선생님이 답답해서 '헛웃음'이 나왔는데, 그 선생님은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갈겼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웃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쓰고 있던 안경은 다리가 부서져 날아가고, 테니스를 좋아하던 그 선생님의 굵은 오른팔이 휘갈기고 지나간 자리에는 빨간 코피가 세차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교무실로 끌려갔고, 반성문을 써야 했다. 내가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들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도, 선생님들은 못 들은 척 하기에 급급했다. 왜냐면 그들은 '선생님'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선생님이었고, 그들은 항상 옳아야 했다.


고등학교는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끔찍했다. 하나하나 저마다 좋아하는 것과 장점이 있는 아이들은 성적순으로 등수가 매겨졌다. 너무나 학생들을 아끼고 존경할 만한 선생님들도 계셨지만, 한 편으로 고압적이고 권위적이기만 한 선생님들이 너무나 많았다. 학생으로서 내가 당시에 할 수 있는 사치는 책을 사서 읽는 것이었는데 한 달에 50만 원 정도 책을 사들였고,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혹은 공부가 안될 때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곤 했다. 그러다 별생각 없이 산 책 중에 박노자 씨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다. 박노자 씨는 2001년 한국으로 귀화한 러시아 인인데, 제삼자의 눈으로 한국의 문화를 새롭게 들려주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가 속해 있는 이 한국 사회가 굉장히 집단주의적이고, 합리성은커녕 조직이 만들어 놓은 권위에 무조건 맹종해야 하는구나. 이 곳은 "아니다"라고 말하면 안 되는 사회구나. 그리고 당시 경상도 집 가정답게 매일 집 문 앞에 놓여있던 <중앙일보>와 별도로 내 용돈으로 <한겨레>를 한 부 더 구독해서 비교해가면서 읽었다. 아침에 신문이 오면, 논술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학교에 가져가서 아침마다 읽었는데 같은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이 어찌나 다른 지 다른 두 나라에 와있는 거 같은 인상을 받았다.


당신이 자유로운 세상


내가 개발을 공부하기 시작한 건 사실 외국에서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부인과는 다른 나라에서 생활했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 외국 생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꼈고 외국 생활이 훨씬 우리 다울 수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외국에서 결코 다수가 될 수는 없었지만, 외국인이라는 소수자로서 느낄 수 있는 사회로부터의 해방감이나 서양 문화 특유의 합리성과 토론 방식을 통해서 '진실'을 혹은 '정의'를 말해도 '괜찮은'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이런 외국 생활을 위해서 개발자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그리고 아래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 부부는 언제든지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결국 한국인이다. 물론 우리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외국에서 지낼 것 같다. 결혼한 지 3년 차에 접어들면서 가끔 육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는데, 한국의 교육 제도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도 종종한다. 그런데 우리가 키우는 그 아이도 결국에는 한국인으로 자라날 거다. 비록 외국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더라도, 우리와는 한국어로 대화할 테고 그리고 결국 자기 나라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될 거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모습은 내 자식에게 보여줄 만큼 건강하거나 자랑스럽지 못하다. 나는 내 자식이 한국을 부끄러워하게 될까 봐 진심으로 걱정스럽다.


그래서 나는 내 사업의 비전을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혼자 더 당당히 설 수 있게 만드는 것으로 삼았다. 혼자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무슨 말인가? 그건 사회적으로 조직에 속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누군가는 조직에 남을 수 있겠지만, 그건 지금처럼 생계를 위해 회사를 떠날 수 없는 많은 직장인들 같은 삶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조직 생활이 될 거라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 생활이 '선택'이 될 때 그제야 회사 문화가 변할 거다. 내가 다녔던 첫 직장에서 맨날 저녁에 회식을 하고 인사불성으로 집에 기어 들어가고, 그다음 날 출근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요즘 애들 취업 잘 안돼서, 이렇게 막 굴려도 퇴사 못한다."라는 말이었다. 당신이 더 이상 회사를 필요로 하지 않아야, 그제야 회사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독립한다는 말은 요즘처럼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떠나는 시기에 물리적으로 당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직을 벗어나 혼자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원하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게 되면 많은 사람이 하는 것처럼 언론이 떠드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앵무새 같은 삶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내가 오늘도 즐겁게 일하는 이유다. 내가 하는 일이 오늘의 한 명, 다음 달의 10명, 그리고 그다음 해의 100명의 삶의 바꿔놓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내가 걷는 길이,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서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사는 나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삶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내가 쓰는 글이 어딘가에서 새로운 도전으로 혼자라고 느끼고, 포기하고 싶은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기를 소망한다. 나는 당신이 더 자유롭게 살아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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