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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아톰 Jan 30. 2021

비 오는 날의 기쁨과 슬픔

저를 묻는 이를 위한 변론

   식당의 종업원으로서 배달원이 아닌 배달 대행은 자신이 속한 플랫폼이나 그룹에 따라 상황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여타 다른 직업에 비해 스케줄 변경이 상당히, 아니 아주 많이 자유롭다. 쿠로 시작하는 플랫폼의 경우 버튼 하나를 누르면 언제든 업무를 시작할 수 있고 다시 누르면 업무를 종료할 수 있다. 오로지 이 자유도를 사랑하여 이 일을 선택한 사람이 있을 정도다. 나도 참 이 자유란 말을 사랑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자유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진다. 자유란 말에 귀찮음이 더해지면 게으름이 되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결괏값으로만 봤을 때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일지도 모르겠다. 자유엔 책임이 따른다는데 배달 일의 경우 결국 자유에 대한 책임은 결국 하루 수입이다.

 


매일 아침의 나를 살펴본 결과 일을 나가기 전의 귀찮음은 전날의 업무 강도, 식사의 질과 양, 여가 혹은 취미 생활의 유무, 취침 시간, 내일 업무 스케줄 유무의 복합적인 연산 작용을 통해 결정되곤 한다.

   이것이 내적 요인이라면 창밖의 날씨는 외적 요인이 되어 이 귀찮음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킨다. 특히 하루 종일 온도와 습도에 따라 순간의 컨디션이 바뀌고 바람을 맞으며 일하는 배달일의 경우 날씨는 매우 직접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그저 날씨가 좋고 하늘이 이뻐서 일하고 있는 순간이 지극히 행복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니 반대로 시작도 전에 비가 오면 귀찮음은 제곱의 제곱이 되는 것이다. 워낙에 집돌이여서 바닥과 창문에 부딪치는 토독토독 빗소리를 듣고 깨는 것을 매우 좋아하던 내가 요즘은 구름 낀 하늘만 봐도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이유다.



   비가 오는 날 나의 아침을 살펴보면 우선 한껏 인상을 쓰며 설마 하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고 비탄과 실의에 빠진다. 이후 다시 침대에 파묻혀 10분 정도를 보내는데 이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선 귀찮음과 돈에 대한 갈망이 피 튀기는 전쟁을 시작한다. 귀찮음은 먼저 일을 나갈 경우 펼쳐질 일들을 상상하게 하는데 빗길의 미끄러움으로 인해 늘어나는 사고의 위험성,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다녀야 하는 꿉꿉함, 안 그래도 라섹 때문에 빛 반사가 신경 쓰이는데 와이퍼가 있을 리 만무한 헬멧에 묻은 비로 인해 더욱더 불편해진 시야 확보 등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 모든 경우는 우비를 입고 그저 평소보다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두발을 활용해 이륜차를 사륜 차로 만들어 조심히 다니면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한 부분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그렇기에 돈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귀찮음이 마지막 승부수로 끌어오는 것이 돈에 대한 합리화다. 바로 어제의 수입. 어제 꽤 벌었으니 하루 정도 쉬어도 괜찮다. 그래도 안되면 지난주의 수입,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지난달의 수입까지 기억의 저편에서 끌고 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이 귀찮음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일을 나가지 않을 경우의 하루를 아주 심도 있게 비극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아주 높은 확률로 그간 쌓인 피곤을 핑계로 침대에서 오랜 시간 누워 자다 깨다를 반복할 것이고 짧은 꿈에서 조차 일을 나갈지 말지 고민할 것이다. 일어나서는 다른 부지런한 배달원의 수입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배달 음식을 시킬 것이고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다시 침대에 누워 끝없이 시간 죽이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하루의 모든 순간 내내 머리에선 일을 나가지 않았다는 자괴감과 죄책감이 그리고 벌지 못한 하루의 수입에 대한 집착이 나를 갉아먹을 것이다. 그러곤 하루 끝에서 생각할 것이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일이나 나갈걸.'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오늘의 오버 슬립으로 인해 취침시간이 늦어져 생체리듬이 꼬이고 이로 인한 피곤도 증가에 따라 내일의 귀찮음은 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상상하면 어느새 한껏 인상을 쓰고 화장실 거울 앞에선 나를 발견한다. 10분간의 전쟁으로 촉박해진 준비 시간에 빠르게 씻고 옷을 입고 그 위에 우비를 입는데 지난번에 벗어 방치한 우비에서 군대 판초우의 냄새가 나 PTSD 반응 비슷한 것이 일어난다. 그런데 오히려 이 기억이 나가는 걸음을 막아서진 않는다. 그때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총을 드나 삽을 드나 상관없이 일급 4000원이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일을 한만큼 돈을 주니까. 그 생각을 하니 돈을 벌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 갑자기 끔찍했던 내 일병 시절 말년 휴가 내내 막노동을 하고 돌아와 초췌한 얼굴에 입술까지 터져있길래 차라리 여기서 편하게 쉬는 것이 낫지 않냐 물었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던 김 병장이 생각난다. 그렇게 지난번에 산 비 오는 날에도 충전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핸드폰 방수 케이스를 장착하고 괜스레 마음이 든든해져 냉큼 문 밖을 나선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일을 나서기 전까지는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내지만 막상 나오는 순간부터는 비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오지 않는 이상 업무의 만족도가 나쁘지 않다. 이 귀찮음의 공식이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항목은 아닐 테니 꽤 많은 라이더들이 집에 머물기로 결정했을 테다. 또 음식은 물론 장보는 것까지 배달 어플로 할 수 있는 시대에 비 오는 날 평소보다 많은 주문이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렇기에 평소엔 이삼십 분씩 주문이 없던 시간에도 콜은 계속해서 주어질뿐더러 비가 오니 '우천 할증'이라는 것이 붙어 수입 또한 평소보다 더 짭짤하다.

그렇게 열심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물에 빠진 생쥐꼴로 집에 돌아왔지만 허물을 벗어내고 샤워를 시작하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귀찮음을 이겨내고 하루 일을 마친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기특함, 주어진 보다 많은 하루 수입이 보람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애들은 힘든 일은 다 기피하고 편한 일만 하려 한다고들 쉽게 쉽게 얘기하는 분들이 많다. 조금 양보하고 찾아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널려 있는데 욕심이 많으니 저러고 있다고들 말이다. 나도 영화 국제시장을 보며 또 미싱사였던 우리 엄마의 치열한 지난 삶을 돌아보며 그 말에 동조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질책하던 시간도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주룩주룩 오는 하루를 돌아보니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그때의 어른들은 어떤 일이든 열심히만, 성실하게만 하면 계속해서 삶이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고 보상이 있던 시대에 살았으니까, 내 집 마련의 꿈이 현실 가능한 계획인 시대에서 살았으니까 힘든 일도 견딜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젊은 우리가 바라는 것은 편하고 돈 많이 주는 일만 골라하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우리가 걸어온 시간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아닐까 싶다.

 "비싼 돈 들여 공부시켜놨더니."라는 부모님의 말처럼 부모님이 그 돈을 얼마나 힘겹게 벌었는지 알고 그 돈으로 내가 나고 자라고 공부했음을 알아서 생긴 마음의 빚, 또 그 마음의 빚은 사치로 느껴질 이들이 공부를 위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져버린 진짜 빚까지 젊은 우리가 갚아나가야 할 것은 너무나도 많고 보상의 문은 턱 없이 작고 적다.

   희망이 없는 세대라 불리는 우리에게, 먼 미래를 바라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우리에게 당장 내일의 적절한 보상은 사치가 아닌 필요이며 양보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이다. 그러니 저당 잡힐 미래가 없는 젊은이에게 미래에 대한 투자로 생각하라며 열정을 페이로 환산한다면 그것은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이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열정과 미래가 아니라 당장의 보상과 지금이 되어버렸다는 것에 왠지 서글픈 마음을 애꿎은 비 탓으로 덮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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