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똑같아
하루에 10-12시간 정도 오토바이를 타다 보면 매일 주유소에 적게는 한번 많게는 두 번 꼭 들려 기름을 넣는다. 한창 바쁜 시간에 기름 게이지가 바닥인 것을 보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어서 조급한 마음으로 주유소를 찾아가지 않고 되도록 여유 있는 시간에 돌아다니다가 경로에 맞는 주유소에 들어가 가득 주유를 하는 편이다.
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름 가격이 매일 바뀌고 주유소마다 편차가 심해 주유할 때마다 기름 가격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데 건당 100원 200원 차이에 울고 웃는 일의 특성상 더욱 그렇다. 내 경우 기름 시세에 따라 100원 단위로 스스로 적절한 상한선을 정해놓고 그 보다 가격이 낮을 때만 고민 없이 들어가 주유를 한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일을 하며 내 영역 안에서 늘 주유소를 주시하고 다양한 장소의 주유소에서 매일 기름을 넣다 보니 그냥 파는 사람 맘대로 인 줄만 알았던 주유소의 가격 설정에 작은 규칙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기름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역시나 주유소의 위치다. 주유소를 사람으로 치면 위치는 수저 타령이랄까. 그저 지어진 땅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차량 통행이 많은 곳일수록, 땅값이 비싼 곳일수록 기름 값도 비싸다. 그런 면에서 기사들이 절대 주유를 하지 않는, 아니 주유소를 쳐다보지도 않는 금수저 땅이 있다. 바로 여의도다. 섬이지만 섬이 아닌 그 땅의 모든 주유소는 휘발유 기준 일반적인 기름 시세에서 기본 500원 이상 비싸다. 그 어떤 차이도 없이 오직 그 땅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격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 생각해보면 현실도 이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이 위치를 제외하면 가격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주변의 경쟁이 아닐까 싶다. 가까운 반경 내에 다른 주유소가 있는지 없는지가 큰 변수로 작용하는데 주유소 두세 개가 마주 보고 있는 경우엔 대부분 내 주유 가격 상한선을 밑돈다. 이외에 조금 더 허름하다거나, 셀프 주유소라거나에 따라 미세한 가격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이 가격에 따라 주유소의 얼굴인 가격판을 다루는 태도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보통 가격이 낮을수록 가격판의 가시성이 증가한다. 가격에 따라 가격판의 숫자 크기가 다르달까. 굉장히 싼 기름 가격 자체가 경쟁력인 주유소들의 경우 대문짝만 한 가격판을 넘어서서 번쩍번쩍 LED로 가격을 보여준다. 먼 곳에서 주유소에 LED 가격판이 번쩍거리고 있다면 망설임 없이 들어가서 주유해도 좋다. 그 일대에서 그곳이 가장 저렴한 주유소일 테니.
여의도처럼 어딜 가나 똑같이 비싸다면 가격을 굳이 숨기지는 않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는 곳에 있는 비싼 주유소의 경우 가격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들어가서 한참을 두리번대야 색 바랜 작은 가격판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고대구로병원 맞은편의 주유소에서 비쌀 거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무작정 주유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 더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분명 가격판을 확인하고 주유를 했는데도 넣고 보니 가격이 한참이나 차이가 났다. 다시 확인해보니 그 주유소는 가격판에 휘발유, 경유 가격을 적어놓지 않고 경유, 등유 가격을 적어놓고 있었다. 왠지 사기를 당한 것만 같은 기분에 한참이나 씩씩댔다.
이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머릿속 배달 지도 안에 내가 갈만한 주유소들이 쏙쏙 박히기 시작한다. 근데 단순히 비슷한 가격이라도 더 선호하고 생각나는 주유소가 있기 마련이고 그 주유소들은 내 지도에 즐겨찾기 별이 추가되는데 그 차이는 각 주유소가 가진 특성과 매력에 따라 정해진다. 첫 주유 때 친절함으로 무장했던 주유소, 24시간 운영하는 주유소, 자주 다니게 되는 길목에 있어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들리게 되는 주유소, 가격이 워낙 싸서 차들이 늘 줄 서 있지만 직원이 많아 일처리가 빠른 주유소, 지나치게 낯을 가리는 내 성격에 가장 마음 편한 셀프 주유소, 까먹고 카드를 놓고 나와 난감할 때 계좌이체로 주유가 가능한 주유소까지 다니다 보면 마치 사람처럼 주유소도 특색이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비싼 땅 위에 있는 최신식의, 값싸고 친절하며 24시간 운영하는 만인의 주유소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주유소 조차 이러한데 하물며 사람은 어떠한가? 애초에 불가능하니 모든 부분에서 완벽할 필요가 없어도 될 이유다. 주어지지 않은 것들을 가지려 지나치게 선망하다가는 가격판을 가리고 눈을 속이는 주유소들처럼 부자연스러워지고 스스로 부끄럽게 살아갈 수 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과 자신을 늘 속이고 괴롭히며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가진 것들과 특성, 매력을 먼저 알아채고 그 부분을 더 밝히는 것이 살아가는 데 있어 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내가 자신의 취향이 맞고 내 매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얼마든지 있다. 또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나타날 테다. 우린 모두 열등하면서 동시에 우월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