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학과 신교수의 식탁 일기
오이냉국의 계절 여름입니다.
군 시절 관측병 보직이어서 한여름에도 하루에 한 번은 산꼭대기 OP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30도가 넘는 무더운 여름날 M16 소총과 무전기를 포함한 군장을 지고 산에 오르는 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고역이지만 산 정상에서 물대신 한입 베어 물던 오이의 맛은 잊을 수 없습니다. '오이가 이렇게 맛있었나?' 할 정도로 담백한 채소의 맛을 처음 깨닫게 해 준 순간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라면과 소시지, 맥도널드 버거와 과자류 등의 인스턴트식품으로부터 초딩 입맛을 길들여 왔던 제게 순수한 채소의 맛을 느끼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제대하면서 다짐을 한 것들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비 맞고 걷지 않는 것과 두 번째 절대 춥게 입고 돌아다니지 않는 것, 마지막으로 콩나물을 먹지 않기였습니다. 비 맞으며 행군하는 것이 너무 싫었고, 겨울철 아무리 움직여도 따뜻해지지 않는 몸이 싫었으며, 콩나물 반찬을 너무 많이 먹어 제대 후 지금까지 아직 집 반찬에는 콩나물이 잘 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이는 군생활중 그 본연에 맛에 빠져 지금까지도 사랑하고 있는 여름 채소로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날이 더워 국과 찌개 끓이기도 다소 덥다고 느껴질 때 소금, 식초와 설탕으로 새콤 달콤하게 육수를 만들고 오이를 나무도마에서 시원한 소리로 채 썰어 육수에 넣습니다. 여기에 얼음과 통깨를 넣고 휘저어 주기만 하면 시원한 오이냉국 완성입니다. 마치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참 쉽고 맛있는, 그리고 계절성이 있는 친근하고 저렴하기도 한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진 메뉴입니다.
오이냉국에는 보통 미역도 같이 넣는데, 미역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거니와 미역 물에 불리기 등 번거로운 과정이 많아 오이만을 넣고 한 대접 만들어 봅니다. 여름철 중독성이 있는 메뉴로 일주일에 한 번은 먹어야 할 정도로 여름철 냉면과 함께 우리 집 가장 인기 있는 메뉴입니다.
오이는 참외, 수박과 함께 대표적인 박과의 식물로서 인도가 원산지로 고대 로마시대부터 식용되어 왔으며, 콜럼버스가 유럽에서 남미로 수출한 식물이기도 합니다.
온실형, 슬라이스형, 피클형, 남지형, 북지형 등으로 나뉘어 전 세계에 다양한 품종의 오이가 재배되는데 다들 모양만 다를 뿐, 맛은 똑같아 다른 식물종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조금씩 맛이 변하는 특성이 없는 채소입니다.
노지에서 자라는 일반 오이와 우리나라에서는 잘 구할 수 없는 피클용으로 특화된 거킨(Gherkins) 오이가 있습니다.(물론 마트에 수입 Gherkins pickle을 많이 구할 수 있답니다.)
중국에서는 3000년 전부터 오이지를 담가 소비했다고 전해지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쓰인 '고려사'에 오이 재배가 언급이 되는 걸 보면 1500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작물화되었으며 식용으로 쓰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이지, 짠지 등 마지막에 '지'가 붙으면 김치의 옛말인 '저'의 방언으로 오이는 고려시대부터 재배되어 오이지로써의 충실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양의 오이도 이와 다르지 않아 '저'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는데 우리가 아는 피클입니다. 피클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만드는 법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일반적으로 거킨(gherkins) 품종의 오이를 피클로 만들어 서양에서 가장 많이 소비됩니다. 한여름철에 나는 허브인 딜과 통후추, 마늘을 넣은 달지 않은 피클인 '코셔 딜 피클(Kosher Dill Pickle)은 미국 뉴욕에서 유명해져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수확철인 여름에도 오이는 샐러드나 스프로 많이 소비되는데 그리스에서 페타 치즈와 올리브, 오이를 섞어서 만든 그릭 샐러드(Greek Salad)가 유명하고, 스페인과 이태리 등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가스파쵸(Gazpacho)라는 차가운 수프를 만들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도 합니다.
위의 사진을 보듯이 오이는 우리나라와 같이 오이지를 담가 먹거나(피클), 여름에 오이가 넘쳐 날 때에는 오이냉국을 먹듯 가스파쵸를 만들어 먹습니다.
영국의 오이사랑은 각별하여 빅토리아 여왕 시절부터 오이 샌드위치가 유행하기도 하며, 런던에는 거킨 빌딩이라 불리는 건축물도 있습니다.
애프터 눈 티(Afternoon tea)는 1840년대부터 영국에 도입된 '홍차와 샌드위치와 스낵류 등을 함께하는 간식' 개념의 식사를 이야기합니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영국인들의 저녁식사 시간이 저녁 8 시대로 늦어지면서 저녁과 점심 사이의 간극을 메꿔주는 간식으로서의 '애프터 눈 티'는 점점 화려하게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애프터 눈 티는 상류사회 지향적인 메뉴들로 그 시절 값비싼 오이 샌드위치를 서브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석탄 가격이 저렴한 영국에서는 유리 온실을 만들어 겨울철에도 석탄으로 난방하여 오이와 장미 등 봄과 여름에 나는 꽃과 채소를 수확하는 것이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오이 샌드위치는 행사를 주최한 호스트의 권력과 부를 자랑할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비닐하우스도 없고 냉장고도 없던 시절인 1840년대, 한겨울에 꽃과 싱싱한 채소, 값비싼 향긋한 차를 즐기는 것은 그 시절 최고의 사치로 지금도 수많은 호텔과 유명한 카페들에서 그 명맥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애프터 눈 티 서비스에는 보통 3단 트레이로 된 접시 위에 오이 샌드위치 등의 샌드위치류와 스콘, 조그마한 케이크류와 마카롱 등이 서브됩니다. 아직도 3단 트레이에 19세기 관습인 오이 샌드위치가 빠지지 않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위의 오른쪽 사진은 홍콩 페닌슐라 호텔의 애프터눈 티 서비스 메뉴로 한국에서부터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런던에는 피클용 오이를 닮은 거킨 빌딩(Gherkins Building)이 있는데, '30 st Mary Axe'라는 원래 이름 대신 'The Gherkin'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파리의 에펠탑이나 서울의 세빛 둥둥섬처럼 호불호가 많이 갈려 런던이라는 고풍의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목소리가 거세었으나 현재에는 런던의 랜드마크로 '오이지'라는 별명과 함께 런던 사람들과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조리 수업을 하다 보면 오이를 못 먹는 학생들이 의외로 꽤 많이 있는데, 이 친구들의 오이에 대한 반응은 오이가 기호적으로 싫다 좋다가 아닌 거의 공포(Phobia)를 느낄정도로 혐오 식품군에 속합니다. 한 반에 한 명은 '오이 포비아' 증후군 학생들이 있어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는 오이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구나 생각합니다.
오이의 맛도 맛이지만 오이향을 싫어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김밥이라던가, 짜장면 위에 올라간 오이 등을 제거한 한 젓가락에 남아있는 오이 냄새가 싫어 젓가락을 바꾸고 싶다고 하니 특별한 향에 정말로 민감한 이들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페이스북 커뮤니티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오싫모')에 며칠 만에 11만 명이 팔로우 한걸 보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참 많은 듯합니다. 커뮤니티 '오싫모' 표어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살 만한 세상을 위해.'라고 간절하고 절실해 보입니다. 표어를 보면서 미각 소수자를 위해 외식업체라도 하나 차려 볼까도 생각해 봅니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경우 박과의 참외나 수박도 싫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만약 가족 중에 '오이 포비아'가 있어 수박을 먹기가 미안해져, 여름철에 수박을 먹을수 없게 된다면 참 곤란하겠다는 생각합니다.
조카도 이 '오이 포비아' 중 한 명으로 누굴 닮아 오이를 싫어할까 하면서 '혹시 병원에서 바뀐 게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형님과 똑같이 생긴 얼굴을 보고는 그냥 집안 식구임을 인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