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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여행자 Sep 19. 2022

한국어 파괴자

한국어가 불편해지다

해외생활 중 아이들이 한국어 단어를 기억하지 못할 때면 아이가 한국에서 적응할 생각에 가슴이 철렁한다고 한다. 현재 타국에서 생활하는 친구는 아이들이 한국어를 잊지는 않을지, 한국에서 적응하지 못하진 않을지 걱정이 많았다.


우리 엄마도 다르지 않았다. 친척에게 부탁해 한국에서부터 그 무거운 문학전집을 독일에서 받아보았을 정도였으니까. 몇 년 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내가 모국어를 잊는 것과 한국의 교육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독일 친구들이 주말을 즐겁게 보낼 동안 나는 토요일엔 한인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다른 한인 친구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한인학교에는 이민을 온 친구들부터 단기유학을 온 친구들까지 모여있었다.


한인학교에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90년대 한국에서 나는 방과 후 학습지를 풀거나 학원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 주말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면, 독일에서의 주말은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독일에서의 일상이 바쁘지 않았기 때문에 주말이라 해서 특별히 더 즐겁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말이면 문을 닫는 곳이 많아서, 갈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다. 주말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해 평소보다 더 심심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한인학교는 내게 주말의 심심함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했다.


한인학교는 처음에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언어장벽으로 인한 답답함을 해소해주는 소통의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모국어를 제법 잘 구사하는 편이었고 재독 한글학교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한국어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친구들과 나는 한국어를 온전히 구사하기는커녕 한국어와 독일어의 경계 그 어디엔가 존재할 법한 하이브리드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언어파괴'였다. 그건 독일어와 한국어를 모두 구사하는 친구들의 가장 편하고 쿨한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한국 어순으로 말하면서, 독일 단어를 몇 개만 넣어 사용했지만, 점차 독일어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어를 완벽하게 파괴했다.

독일어 어법에 따라 한국 단어 끼워 맞춰 사용한 예




부모님은 내가 한국어를 잊고 있다고 생각하시며 걱정하셨는데, 온전히 그렇지만도 않았다. 어떤 순간엔 한국어 단어보단 독일 단어가 적합할 때가 있었고, 독일어 표현보다는 한국어 표현이 더 적합할 때도 있었다. 게다가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독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현지인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던지라 독일어를 사용하는 편이 내 정서에 맞아떨어졌다. 어쩌면 그 당시 나는 한국어만 잊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마저도 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이 반드시 있다.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외국어를 얻게 되지만,  모국어를 잃게 된다.

나는 아직까지도 한창 책 읽기에 재미를 들인 시점에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했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매일 도서대여점으로 달려가 책을 빌려보며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배우면서 책 읽는 즐거움을 한동안 잊고 지냈으니 말이다. 한창 재미를 느낄 때 꾸준히 책을 보았더라면 좀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기에 나는 독일에서 살았던 것보다 책 읽기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 것이 난 내 인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나의 경우는 참 운이 좋아서 한국어 파괴로 끝났지만, 언어를 잃음과 동시에 한국인의 정서마저도 잃어 귀국한 뒤 적응하지 못해 고생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이민이나 아이의 유학을 고민하는 부모님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들이 모국어를 잊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유학 당사자의 가장 큰 고충은 나의 정서를 표현할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나 완전히 다시 적응할 때까지 나와 같은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는 종종 교수님으로부터 한국어를 못한다는 핀잔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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