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의 소설에서는 온갖 것으로 변하면서도 스스로는 작가로서의 삶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외로움과 고독에 살다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마저 잃었고, 지금의 위대한 명성은 단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채 그의 현실은 그렇게 끝났다. 그의 그림은 그와 닮아서 대부분 작품의 크기가 작다. 그러나 저마다의 눈에 그 작은 그림이 다 담겼을 땐 어떤 그림으로 남을지 해석과 감상이 무한하기에 결코 작지 않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생은 누군가 작다, 말할 수 있겠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단연코 위대하다.
최근 한 유명 출판사에서는 카프카의 단편집을 리커버 해서 출시했다. 그의 작품은 변하지 않았다. 오직 표지만 달라졌을 뿐이다. 마치 쏟아지는 감성 젖은 에세이에, 산문에, 무엇이든 의미를 억지로 부여하는 글들에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예상을 했던 것처럼. 카프카의 글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다시 읽히고 읽기를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을 갖고 있었다. 어느 지혜로운 편집자는 그렇게 또다시 카프카를 선택했던 거다. 나무의 희생을 빌리고, 종이에 글자를 다시 채웠다. 카프카로 오늘을 살아가는 돈을 벌기로 했다. 카프카가 허락한 적은 없지만 이미 대중에게로 간 그의 글은 그렇게 하도록 두었다.
예쁜 표지를 보고 책을 샀더라도 오늘날 그의 글을 읽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카프카가 없었다면, 그가 그의 생에 외롭지 않았었다면 이 모든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나는, 그래서 내 생에도 글을 쓰는 삶을 택한 나에게는, 그의 외로움이 감사한 일이다. 어느 편집자가 표지만 바꿔 또 새로운 독자를 찾는 일처럼 나 역시 카프카를 먹고 산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고 정죄할 수도 없다. 그저 의심할 뿐이다. '카프카를 이대로 둬도 괜찮은 건지. 고흐의 생이 그저 안타깝다, ' 하고 넘어가면 그뿐인 건지. 그리고 나는 문장을 쓰다가 멈춘다. 이들을 알고, 이들의 예술을 사랑한 나는 앞으로 어떤 문장으로 글을 시작해야 할지 두렵다.
내 생에 처음으로 책을 내기로 한 후, 새로운 경험들의 연속이다. 축하의 인사를 많이 받았다. 꾸준히 글을 쓰는 삶에 대해 스스로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뿐 누구의 인정을 구한 적은 없다. 다만 다양한 삶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거나,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언제나 반감을 가졌다. 나의 삶에 대해 존중 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나의 글쓰기를 부질없거나 의미 없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치부해 버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글 쓰는 일은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인정이 아니더라도 작은 관심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그 반응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생의 길이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는 영원히 살 것처럼, 어느 누구는 오늘날 바라본 현실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삶. 자랑하지 않고 높아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삶. 이 짧은 생을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벌어지는 비극들. 그래서 나의 소중한 지인들은 말한다. 첫 책이지만 유명해지기를,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좋은 의도와 격려로 전한 말이기에 고마움도 크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유명해지는 건 모르겠고 언제까지나 저답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늘 편안함과 동시에 새로움을 원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 영어권 나라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래도 내가 익숙한 언어와 문화가 편하기 때문이고, 대한민국과는 다른 일상이 조금은 다르게 펼쳐진 곳이기 때문이다. 너무 낯설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편하지도 않은 긴장감이 좋다. 사람을 만날 때도, 책이나 영화를 선택할 때도 나의 이런 성향이 작품 선택을 좌우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를 잃고, 세상의 흐름과 유행에 이끌려 쓴 글은 쓰지도 못할뿐더러,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돈이 되는 글이 목적이었다면 일찍이 나의 일상을 포기했어야 한다. 지금까지 나의 글쓰기는 나의 생계를 책임져줄 만한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돈이 되는 글쓰기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굳이 그런 글쓰기를 동경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와 선택은 돈이 되는 글쓰기가 아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상에서의 철학적 질문과 의문을 남기는 글쓰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작품을 통해 걷는다는 것. 즉, 돈으로 결과를 내기 위한 움직임이 아닌 인간이 그저 당연히 영위하게 된 움직임. 걷는다는 것에 대해, 그런 가치들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의했다. 걷는 의미와 걷기에 대한 인문학적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경제성의 원리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무지함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우리가 걷기를 행할 때, 장소를 이동하거나 바람이 어디로 이동하는 중인지 감지하는, 이 모든 순간이 알려주는 지혜를 알아차릴 때 일상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고 말이다.
걷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 비로소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걷는다'는 이 평범한 행위를 축하하지 않는다. 백만 팔로워, 조회수, 시청률, 중쇄 여부, 판매 부수, 랭킹 등등. 우리 생의 의미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대상이 될 때 의미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이란 저서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으니 성공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성공을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걷는다는 것. 오늘날의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진정 사색이 필요하다는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거다. 나는 이 처음의 마음이, 의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타강사 덕분에, 벼락치기가 가능한 요약정리 덕분에 빠르게 점수를 내고 성공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어쩌면 그런 내성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꾸준히, 반복하는 힘에 대해서는 미련함이나 답답함으로 치부해 버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새 책을 내는 시점에 말하고 싶다. 나는 '글쓰기'에 대하여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나의 글쓰기'는 결코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내가 읽고 경험하고 생각해서 쌓아 올린 이야기. 그래서 결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이야기를 완성하는 각자의 세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이다.
쓰는 나는, 살아있는 나는 그 누구도 될 수 없다. 유명해지는 건 아주 작은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 또는 이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이 지구에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삶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