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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Jul 15. 2023

적당한 이웃

[연재] 인사의 뒷모습

'그거 진심이야?' 연인들의 질문일까. 나의 경우는 이웃의 질문이었다. 그는 종종 진심을 물었다. 그 말이 정답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싶은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마음이 내 말과 동일한지, 지금 네 말이 그저 피상적이거나,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이야기했던 건 아닌지를 따지고 들었다. '내 마음이 어떤지를 묻는 거야? 사람들의 모든 말들이 마음과 같을 수는 없어. 그냥 적당히 그렇게 넘어가는 거야, 대화란 그런 거야.' 그가 말한 '진심'이란 것에 나는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그가 화를 내기라도 하는 날엔 '그래그래 알았어, 사실 나는...'이렇게 운을 떼며 굳이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다. 그에게 진심은 진실과도 같았던 걸까. 그는 스스로를 가식이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고, 가식을 죽도록 싫어한다고 종종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을 요구했었던 그의 속마음은 그 어느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다. 타인의 진심을 먹은 그의 진심은 점점 흉측한 모양으로 변해갔다. 언젠가 그 흉한 모습이 자신이 들고 있던 거울에 비친 날이면 그는 자신을 꽁꽁 숨겼다.


마음은 서로 통하는 법. 진심과 진심이 닿지 않고 어느 한쪽에서만 흘러가고 있다면 오해라는 오물은 켜켜이 쌓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오물을 치우고 자신의 마음과 타인을 돌아본다. 그러나 그는 반대의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택했다. 오물이 없는 쪽을 찾아 또다시 진심을 찾아 방황했다. 그는 나와의 관계에서 오물까지는 아니어도 티끌, 또는 먼지 정도가 불편해졌다. 그는 나에게서 멀어졌다. 기어코 그는 나와의 거리 두기를 택했다. 이웃과의 이별이라니, 경험해보지 못한 이별통보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별의 순간 그가 말했다. 바로 이것이 나와 너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그는 사라졌다.


한 때 에세이 베스트셀러들의 제목들은 이랬다. '괜찮다' 라거나 '내버려'두거나 '넘겨버리거'나 등 뭔가를 자꾸만 두고 가라는 방향성으로 우리 삶을 위로했다. 사람들의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을, 그 방황을 글을 쓰는 사람들 마저도 이 세상의 아픔들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뭔가를 애쓰지 않고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기를 택했다. 처음에 나도 이런 제목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별을 감당할 자신은 없고 또다시 무언가를 회복하거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에게도 너무 컸기 때문이다.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어려움이 닥칠 때면 정면 돌파가 아닌 그만두는 방법을 택하고만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생각을 하지 않는 쪽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넘어진 후에 남은 상처는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넘어지며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와 적당했던 때에도, 이별했던 때에도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또 다른 시련과 관계에 대한 복잡한 생각과 풀리지 않는 숙제들이 가득했던 모든 순간들도 그렇게 지나갔다. 이젠 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가 됐다. 나는 때때로 그를 생각했다. 그가 잘 지내고 있을까?라는 걱정보다는 그에게 누군가 진심을 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언젠가 그를 만났다. 아주 잠깐 스쳐갔지만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고, 한눈에 알아본 그 찰나에 그에게 말을 걸까, 아니면 모른 척 지나갈까를 고민했다. 고민하는 사이 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고 내 의지와 다르게 먼저 내 입술이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는 말했다. '어, 오랜만이네, 잘 지내고 있지?' 정말 내 안부가 궁금했을까, 진심을 그토록 좋아하는 그였다면 이 짧은 인사도 진심이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내가 말했다. '정말 궁금한 거야?' 어색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대화의 빈 공간을 만들지 않았고, 나는 말들로 침묵을 깨는 동안 진심을 전했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고, 나는 네가 궁금했어. 아, 맞다. 이 말은 진심이야.' 그가 웃었다.


우리가 헤어져 있는 동안 그는 스스로 그토록 진심을 찾았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한 때 그림을 그리며 사는 삶을 꿈꿨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자가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겠다는 건 한량을 하겠다는 뜻과 같았다고 했다. 그림을 더욱더 잘 그리는 방법들을 고민하며 살고 싶었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시선과 편견, 그리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말들에 묶여 자신이 진짜 그림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그림을 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물어보기도 했지만 좋아서 시작했다는 말이 전부였고,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또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남자로서의 책임감을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스스로 생각했다. '그림으로 먹고살지는 않을 거야, 이건 취미가 될 거야.' 정도로 마무리했다. 그렇게 마무리한 생각들은 꿈을 마무리하고, 더 이상 그림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랬던 그는 그야말로 그림을 취미로 하게 됐고, 먹고사는 일을 찾아 새로운 일들에 도전했다. 다행히 그림이 아닌 새로운 일들도 그에게 성취감을 안겨줬다. 그림이 아닌 다른 분야였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고, 큰돈을 벌기도 했다. 그렇게 소위 '잘 나가고' 있을 무렵, 그림을 하는 그를 한심하게 여겼던 이들이 오히려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 한다더니 그 열정은 어딜 가고...?' 그때부터였다. 그가 진심을 찾아 헤매었던 때가.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한 진심 어린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그였다. 그림을 그렸을 때에도 새로운 일들을 시작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인정과 사랑은 곧 그가 그 자신에게 주는 인정 또는 사랑과 같아서 그는 언제나 과정에서 힘써 달려온 그를 위로하지 못했다. 그저 한 번 뱉으면 사라지고 말았을 말들에 휘둘려 그는 관계와 사랑, 꿈까지 잃어버렸다. 차라리 혼자일 때가 나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편하다,라고 느낀 그는 다른 이들과의 진심을 잃어버릴 때, 홀로 있음을 택했다.


내가 진심이라고 이야기 한 순간 그는 피식 웃었다. '내가 궁금했다니 다행이네, ' 나는 어색했지만 침묵을 이어갔다. 그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진심이 아니어도 괜찮지 뭐, '


언젠가 브레히트를 이야기 한 책에서 '소격효과'에 대해 은 적이 있다. 소격효과의 의미는 학자마다 다양하게 해석한다고 한다. 진중권의 말을 빌리자면 그 낱말이 영어로 '소외', '거리 두기', '탈친숙화, ' '다르게 하기' 등 다양하게 번역되는 것은, 소격 효과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함몰되고 있는 무언가, 너무 집중한 나머지 빠져나오지 못하는 순간들, 그때를 위해 문학적 장치로 소격효과가 사용된다. 연극에서는 극 중에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하는 식으로 잠시 장면을 환기시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브레히트는 삶을 문학으로 옮긴 과정에서 소격효과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곤 했다. 이런 효과는 더욱더 작품을 풍성하게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매몰되지 않는다는 건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고 가는 발걸음과 같다. 돌다리는 아주 튼튼하다는 믿음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두드리고 건널 수 있고, 잠시 멈추어 주변을 돌아보다가 다시 건널 수도 있다. 돌다리를 건너다가 다른 길을 발견하면 그곳이 꼭 돌다리가 아니더라도 도전해보고 싶은 용기가 있다면 건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떤 길을 가는 것보다 중요한 건 강을 건너는 중에 허리를 펴는 일이다. 이 강을 잘 건너야지, 하는 생각에 이미 빠져있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소격효과를 잃어버린다. 이 강이 어디까지 흐르는지, 내가 지금 어떤 길을 밟고 돌아왔는지 더 넓고 풍요로운 순간들을 놓칠 수 있다. 허리를 핀 자만이 그 강을 즐기며 건널 수 있다.


나는 진심을 쫓아왔던 그에게 브레히트의 글을 선물했다. 그가 만든 '진심'에서 이제는 좀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가 만약 그의 진심을 어디에도 닿지 않게 내버려 두고서는 정작 본인은 다른 사람들의 진심이 자신에게 어느 때에 닿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이제는 상황을 조금 낯설게 해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가 만든 세상을 다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만들어 보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그렇고 그랬던 모든 것들을 가끔씩은 다르게 보는 연습. 그것은 그가 누군가의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고,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첫걸음이라 생각했다.


안되면 그만이지 뭐, 그냥 내버려 두지 뭐, 아니면 말지 뭐, 이렇게 내버려 두는 세상의 이면에는 우리가 변하지 않고 세상이 이대로 멈춰있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사악한 미소로 웃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버려 둘 수 없다. 적당한 이웃은 과거의 슬픈 에피소드로 족하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와주기만을 바라지 않고 진심으로 다가가기를 시작하는 지점에 함께 서 있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복잡한 도심을 여행하다가 볼 수 있는 풍경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화려하고 높은 빌딩들이 서로 키 자랑을 하듯 

높고 빽빽하게 가득 찬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런 도심에 서 있으면, 

높이 올라가기를 꿈꿨던 젊은 날에는 

하늘로 치솟아 있는 건물의 꼭대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하고요. 

인생의 단단함이 느껴지는 중년의 때엔

높은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땅의 힘을 살피게 된다고 하네요. 

지금 여러분은 어디를 바라보고 계신가요.

어디든 좋습니다. 

높은 곳도 낮은 곳도  

멋진 도심을 이루는데 꼭 필요한 공간이니까요. 




지난날

라디오 방송 오프닝으로 썼던 글에 더하여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쓸모가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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