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소설집 <인생 연구>
조용했던 그녀가 불현듯 임신 소식을 전했다. 그녀에게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였다. 방송국에서 몇 번 인사 정도만 했었던 사이였으니 사적인 일들은 알 수가 없었던 게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워낙 조용했던 그녀였기에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에도, 그저 함께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둘이 참 잘 어울린다는 누군가의 짓궂은 농담에도 그저 무던하게 웃고 넘어갔던 그녀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녀는 남자친구가 없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혼 유무 정도는 우연히, 지나가는 말이라도 언급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토록 아무도 그녀가 결혼했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싶었던 거다. 그녀가 임신으로 직장을 잠시 쉬어가야겠다고 통보를 했던 그날. 우리는 또 한 번 기회를 놓쳤다. '결혼은 언제 한 거예요?'라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는 것. 그 질문이 없었던 탓에 그녀가 없는 동안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임신을 해서 사회로 복귀하기가 힘든 상황일 거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개편 이후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자리를 잡고 스텝들도 자신들의 루틴을 찾아가고 있었을 무렵엔 그녀는 남편이 없이 임신을 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분위기였다. 그녀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나는 전국에 있는 맛집을 찾아다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사장님들을 만나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뻔한 구성의 프로그램이 꽤 안정적이게 느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루는 30년 내공의 중국음식 전문점을 찾아갔다. 사장님은 웍에 담긴 해산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으며 짬뽕 한 그릇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나에게 설명했다. 사장님의 이야기를 모두 기억한다면 짬뽕한 그릇을 만원 정도의 가격에 먹는 건 조금 미안한 일이 돼버렸는데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조금 가볍게 풀기 위해 방송작가로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었다. 결국 프로그램은 꽤 가벼운 느낌으로 완성됐지만 사장님이 이런 구성과 편집에 만족하실지에 대해서는 두려워서 물어보지 않았다. 사장님이 마음에 안 든다며 컴플레인을 걸어오기라도 하는 날엔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최대한 좋은 분위기로 그날 촬영도 그렇게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그녀가 가게로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그녀는 출산 후 회복 중이었던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꽤나 가까운 사이였던 것 마냥 인사를 나눴다. 나는 아직 식사를 하기 전이면 함께 밥을 먹고 가는 건 어떻겠냐,라고 했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몸은 좀 어떠냐, 아이는 딸이냐, 아들이냐, 앞으로 복귀는 언제 할 예정이냐, 나는 내가 진짜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던질 때까지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조금씩 다른 질문들을 이어갔다. 고맙게도 그녀는 편안한 표정으로 모든 질문에 대해 성의껏 답을 해줬다. 주방에서는 웍질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해산물이 달궈진 웍에서 둥글둥글 굴러간다. 불맛이 입혀지고 노릇노릇 해진다. 한쪽에서는 짬뽕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결혼은 언제 했어요? 완성된 짬뽕이 나오기 전이었다. 일찍 했어요. 임신이 늦어진 거예요. 남편이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어서. 그렇게 그녀의 사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 나는 그녀가 입을 연 순간 모든 것이 충격에 휩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대학을 나오고 방송국에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평범한 연애를 했고 결혼을 했다.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서 안 했던 것뿐이지 자신의 이야기를 숨길 이유도 없었다. 자신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누가 과연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들어줄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도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쉽게 나의 이야기를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어떤 건지 내가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 분위기. 모두가 친한 것 같지만 모두가 남이라고 생각하는 게 확실한 것 같은 분위기. 방송국에 있던 우리는 모두 그 분위기를 깨지 못하고 각자의 분위기로 남아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역할들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화면에 보이는 인간사 희로애락이 담긴 프로그램은 현실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늘 감동적이었다.
지금이라도 누구에게라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해도 어쩔 수 없지요.라고 스스로 치부해 버린 그녀의 이야기가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해해도 그만이지, 어쩔 수 없지라고 마음먹는 일에 대하여 나는 그 말들은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서,라는 말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양한 방법을 만들어주면 되지. 안되면 내가 그 방법을 찾아가면 되지. 그렇게 오해하고 미워하고 혐오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지 않고 싸우더라도 조금은 '나 여기 있어요' 외치면 되지. 그러니 오해하지 말라고, 미워하거나 혐오하거나 나를 그냥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말하면 되지,라고 스스로 변하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며 생각할 때가 있다. 평범한 날들로 채우는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다가 어느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면 그 평범함은 특별한 순간들이 된다. 나아가 때론 예술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들여다보지 않는다. 치부해버리거나 사라지게 두거나 오해로 남겨 외면한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인지 모르게 떠나보내는 슬픔이다.
<인생 연구>를 읽기 전에는 그런 삶이 나의 삶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아니, 더욱더 정확히 쓰면 그런 삶이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 스스로 내 삶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누군가의 인생을 단 한 줄로 정리하려고 오만한 객기를 부린 채로 남겨졌을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터전에 대해 생각하며 누군가의 발자취를 떠올린다거나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꿈? 미래? 비전? 뭐 이런 것들을 계획하다가 결국엔 돈이라는 뻔하고 재미없는 인생만을 그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 삶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 결국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도 인공지능이 써 내려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무미건조한 문장들로 완성할 것 같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 소설은 이게 소설이야 에세이야, 뭐야 사실이야 가짜야?라는 논쟁으로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다가 추측을 하다가 정신없이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언젠가 세월이 흘러 그 열띤 논쟁을 했던 소설을 다시 읽으면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은 생각이 든다.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고 우리의 논쟁이 조금 더 이 소설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면 상관없겠지만 결국 그것도 아니었으니 논쟁은 잠시 재미로 그쳤을 뿐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논쟁이 진짜 이 이야기에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의 지점에 이를 때 나는 언제나 돌아서서 말한다. 소설이 되어 이 세상에 남겨져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그녀가 그녀이기에 다행이다. 그녀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였거나,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서였거나, 말할 기회가 없었거나 하는 문제는 사실 그녀의 인생에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건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