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가 살아남은 이유

by 괜찮은 작가 imkylim

하와이에서 꼭 먹어보라는 스팸 무스비, 로코모코, 아사이볼, 말라사다, 쉐이브아이스…. 썩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최다 과일 섭취’를 하기로 했다. 이미 익숙한 과일이라도 현지의 신선함은 다를 테고 처음 보는 과일이라면 새로운 경험이 될 테니까.


코스트코에서 산 몇 가지는 어쩔 수 없이 양이 많았지만(내 고집만 부릴 수는 없으므로) ABC store나 파머스 마켓에서는 작은 봉지 내지는 하나씩만 샀다. (다양하게 먹어봐야 한다는 내 주장으로) 그래서 내 손에 쥔 과일은 망고, 코코넛, 사워솝, 블랙베리, 블루베리, 체리, 골든 하미 멜론, 애플 바나나, 타이 애플 바나나, 치코, 리리코이, 리치, 에그 프룻, 마운틴 애플, 망고스틴, 아보카도, 파파야(망고스틴은 하필 상한 걸 골라 와서 못 먹었고, 파인애플은 통으로 사기에 너무 커서 썰어놓을 걸 먹었다). 그리고 사탕수수는 직접 씹으며 빨아먹는 거친 모습을 상상했지만 즙을 내 주기에 우아하게 마실 수 있었다.

여행 중 먹어본 과일.jpg 여행 중 접한 과일 정리. 역시 과일은 파머스마켓에서 사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현지 분위기도 느끼고 다양하게 접하고!


아코디언 북에도 정리해 봤다.

이 중 파파야 이야기를 좀 하겠다. 예전에 먹어본 기억 속 파파야는 부드럽기만 하지 냄새가 쿰쿰해 그다지 당기는 과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작가 신이현의 ‘열대 탐닉’, ‘숨어 있기 좋은 방’을 읽어보면 파파야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다시 시도했는데 이번엔 맛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기중 교수의 ‘열대과일 100가지 맛 여행’이라는 책에서 답을 찾았다.

“파파야는 여러 종류로 변이가 많아서 딱 이런 맛이다 하고 말하기가 좀 어려워요. 어떤 것은 아무 맛이 안 나고 어떤 것은 아주 달고. 그래서 그저 잘 고르는 것이 중요하지요.”


에그 프룻도 신기했다. 가운데에 커다란 씨앗이 있고 질감도 맛도 당도 높은 찐 단호박과 흡사했다. 어떻게 이런 과일이 있나 싶었다. 단호박 먹을래, 에그 프룻 먹을래? 한다면 에그 프룻을 고를 것 같다. 맛있고 찔 필요도 없어서 먹기 편하니까.


치코는 씨앗이 감을 닮았는데, 맛은 시럽에 재운 곶감이 있다면 이런 맛이 아닐까 싶었다. 너무 달아서 나중에 기회가 있더라도 다시 먹고 싶지는 않았다.


마운틴 애플은 안에 든 씨앗이 재미있었다. 불규칙한 모양에 가벼운 돌 모양이 한 개 내지 세 개씩 들었다. 껍질은 광택이 있는 붉은색이며, 속은 하얗고 수분이 많았다. 많이 달지는 않았고 청량한 신맛이었다. 씹는 느낌은 파프리카와 흡사했다.


모든 과일을 다 먹지는 못했지만 꽤 만족스러운 과일 탐색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호놀룰루항을 걷다가 나무 아래 커다란 열매를 발견했다. 두 개가 떨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뭉개진 부분에 개미가 바글거렸고, 다른 하나는 온전해 보였다. 약간 길쭉하고 둥그런 모양에 울퉁불퉁한 격자무늬, 그리고 연초록빛. 나는 반가운 마음에 냉큼 집어 들고 남편에게 말했다.

“이거 빵과일 같아, 익히면 감자나 빵 같아서 미래의 탄수화물 식량 후보래.”


집어 든 열매의 줄기 쪽에서 흘러내린 즙 때문인지 거기에도 몇 마리 개미가 노닐고 있었다. 당황한 개미가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남편도 당황했다. 남편은 모르는 거 줍지 말라며 다시 내려놓으라고 했다. 나무 앞에 빵나무라는 이름표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나도 여행 전 인터넷에서 잠깐 사진을 본 게 전부라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빵나무 올려다본.jpg
빵나무 열매.jpg

아쉬운 마음에 뭉개져 있던 열매를 발로 건드려 슬그머니 눌러봤다. 푹 익어서인지 힘없이 퍼졌고 개미 떼는 우왕좌왕 난리가 났다. 꾸물대는 나를 본 남편이 얼른 버리라고 다그치더니 돌아서서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손에 든 걸 버리지 않으면 차에 태워주지 않을 기세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있던 자리에 열매를 도로 내려놓고 사진으로 남겼다. 그러고는 차에 돌아가 앉으며 웅얼거렸다.

“아무래도 빵과일인데.”


나중에 찾아보니 빵과일이라는 내 추측은 맞은 듯했다. 그런데 빵과일은 수확 후 빠르게 상하기 때문에 유통이 제한적이라고 했다. 지역 전통 음식점이나 특정 농산물 장터에서만 구할 수 있다고. 발로 눌렀을 때 저항 없이 퍼지던 느낌이 떠올랐다. 그건 아마 상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손에 들었던 열매라고 신선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남편이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숙소에 돌아가 그걸 먹어보려 했겠지. 안 먹어본 과일이니까 맛이 이상해도 아, 이건 이런 맛인가 보다, 했겠지.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어쩌면 나는 남편 덕에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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