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대하는 태도

by 괜찮은 작가 imkylim

중급 1 음식과 요리 단원에 ‘양파 껍질을 벗기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양파 껍질을 깐다고도, 벗긴다고도 해요. 혹은 다듬는다고도 하지요. 왜 그럴까요. 우선 양파 말고 사과, 귤, 데친 토마토로 어떤 표현이 자연스러운지 살펴보겠습니다.


사과 껍질을 깎다/벗기다, 귤껍질을 까다/벗기다, 데친 토마토 껍질을 까다/벗기다.


‘깎다’, ‘까다’, ‘벗기다’에 여러 의미가 있지만 위의 문장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사전적 의미만 보면 이렇습니다.


* 깎다: 칼 따위로 물건의 거죽이나 표면을 얇게 벗겨 내다.

* 까다: 껍질 따위를 벗기다.

* 벗기다: 가죽이나 껍질 따위를 떼어내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낱말 편 2’, ‘까다/벗기다’를 비교한 부분을 읽어보면 ‘까다’는 비교적 단단한 껍질을 깨뜨리거나 제거할 때, ‘벗기다’는 부드러운 껍질을 제거할 때 주로 쓴다고 적혀있습니다. 참고 그림을 보면 ‘까다’ 옆에는 땅콩, 조개, 콩, 호두가, ‘벗기다’ 옆에는 사과, 바나나, 양파, 배가 그려있어요. 책의 정의대로라면 사과와 양파는 물론이고 귤, 데친 토마토의 껍질도 부드러운 편이므로 벗겨야 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접한 일상에서 칼을 사용하는 사과나 배, 감 등의 과일 껍질은 흔히 ‘깎는다’라고 해요. 홍시나 데친 토마토처럼 껍질이 손으로 홀랑 벗겨지면 ‘벗기다’가 어울리고요. ‘까다’가 조개, 호박씨, 땅콩 등의 단단한 껍데기나 껍질에 어울리지만 귤도 깐다는 표현으로 많이 써요. 바나나도 벗긴다고만 하지는 않아요. 귤과 바나나의 껍질을 깐다고도 하는 건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귤은 단단하지 않지만, 껍질을 벗기기 전에 껍질 안쪽으로 손끝을 집어넣어 제치거나 벌리는 동작을 해요. 거의 다 벗길 때까지 손가락이 안쪽에 파고들어 있지요. 호박씨나 땅콩, 콩꼬투리를 까는 동작과 유사하지 않나요? 그래서 귤을 까서 먹는다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우리가 바나나를 먹을 때의 동작도 떠올려 보죠. 바나나 꼭지 부분에 손끝을 집어넣고 제치는 동작(까다)에서 시작해 껍질을 쭉 벗기는 동작으로 끝나요. 그래서인지 바나나는 까먹는다고도 하고 벗겨 먹는다고도 해요.


서두의 의문, 양파 껍질을 깐다고도 하고 벗긴다고도 하는 이유도 이제 설명이 되겠지요. 양파를 다듬는 동작을 머릿속에 그려보겠습니다. 일단 처음에는 칼로 양파 밑동을 살짝 잘라내요. 그다음 손으로 껍질을 벗겨도 되지만 칼을 쥔 김에 칼로 벗기죠. 잘라낸 밑동 겉 부분에서 시작해 껍질을 까듯 제쳐가면서요. 그리고 꼭지 부분도 칼로 잘라내요. 칼을 썼지만 양파 표면이 깎인 흔적 없이 매끄러워서 깎는다는 표현은 어쩐지 어색해요. 대신 까는 동작과 벗기는 동작이 혼재되어 있지요. 파와 마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까고 벗기면서 요리할 때 필요 없는 부분을 떼어내고 다듬지요.


‘깎다’에는 물건의 거죽이나 표면을 얇게 벗겨 낸다는 의미가 있어서 약간의 ‘소실’이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풀이나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고, 물건값을 깎는다고 합니다. 살을 깎는 노력이라는 말도 있지요. 살이 야윌 만큼 애쓴다는 관용구인데 ‘깎다’ 뜻을 곱씹다 보니 괜히 살벌하게 느껴지네요. 분골쇄신(粉骨碎身)보다는 덜 하지만요.


‘까다’에는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느낌이 있습니다. 구어체에서 ‘까놓고 말해서’라고 하면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한다는 뜻이지요. ‘까먹었다’라고 하면 알맹이를 몽땅 먹어버린 듯 뭔가 잊어버렸거나 돈이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는 의미고요.


‘벗다’에는 술술, 홀랑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깎다’와 ‘까다’의 사전적 의미에도 ‘벗겨 내다’가 들어가듯, ‘벗기다’에는 겉에 붙어 있는 것을 떼어내 속이 드러나게 한다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옷이나 신발을 벗고, 허물이나 책임, 누명을 벗는다고 하지요. 포장이나 오래된 페인트를 벗기기도 합니다. ‘베일이 벗겨지다’라고 하면 숨겨져 있던 진실이나 정체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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