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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Aug 08. 2024

소설_엉덩이의 교집합 3화

  그런 재미도 잠시, 이 학기에 강의할 곳을 찾지 못해 두 손에 머리를 묻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만약 한 학기를 일없이 지내게 된다면 기나긴 나날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막막했다. 아니, 어쩌면 한 학기 공백으로 끝나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내년, 그리고 그 이후도 어찌 될지 묘연했다. 생활비는 물론이거니와 품위유지를 위해 산 물건들의 할부금을 떠올리자 한숨만 나왔다. 나를 딱한 백수로 바라볼 남들의 시선을 떠올리면 사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어떻게든 강의할 자리를 찾아야 했다.


  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오후, 나는 오랜만에 대학 동창인 혜인과 지영을 만나 차를 마셨다. 혜인은 K 대학 수학과 전임교수였고, 지영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전공을 바꿔 대기업 연구소의 프로그래머였다. 나보다 성공한 그녀들을 만나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었다. 혜인에게 강의 자리를 알아봐 줄 수 있느냐고 연락했을 때 얼굴이나 보자는 혜인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둘은 서로 아이가 몇 학년인지도 알았고 근황을 나누기도 했다. 종종 만나며 지내고 있었던가 보았다. 지루한 안부 인사가 끝나자 혜인은 내 쪽으로 상체를 돌리며 조용하게 말했다. 시간강사보다는 차라리 과외선생이나 학원강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인기만 얻으면 돈을 얼마나 잘 버는 줄 아느냐고. 진지한 목소리가 어쩐지 내 처지를 무척 고심한 척하는 가식으로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모로 저으며 괜히 찻잔을 손톱으로 긁었다.


  우리 수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내가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반박할 처지가 아니라서 더욱 분했다. 나 역시 이미 전임교수가 되기는 어려운 나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사학위까지 받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대학 강의 외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강의평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매 수업을 충실히 했고, 학생들에게 무척 친절하게 대했다. 전임 교수들과의 친분 내지는 나도 그들 못지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들과 공동 저자로 논문을 쓸 때 내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도 학생들에게 말해주었다. 당연히 교수들에게도 공을 들였다. 명절과 생일을 일일이 챙겼으며 운동을 즐기지 않으면서도 골프를 배웠다. 최근에는 관심조차 없던 개도 키우기 시작했다. 돌아온 것은 강의를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참담한 말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직장에 매여 사는 것보다 시간강사가 좋다고, 돈이 전부는 아니지 않느냐고. 혜인은 내 옆에 놓인 명품 가방을 흘끗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하긴, 강남에 아파트도 있겠다, 무슨 걱정이 있겠니.”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걱정이 많았다. 집만 있을 뿐, 강사료로는 내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부족한 돈은 전남편이 남긴 위자료에서 충당했는데, 그 또한 곧 바닥을 보일 거였다. 눈치도 없이 지영이 말을 덧붙였다. “얘, 그 아파트 35년 넘었지? 계속 갖고 있어, 나중에 재건축이라도 하게 되면 넌 노후에 돈벼락 맞는 거야.”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지영을 잠시 쏘아보았다. 지영은 “어휴, 너한테는 조심스러워서 말을 못 하겠어. 내가 뭐, 말실수라도 한 거니?” 하며 눙치고는 자기 가족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딸이 무슨 대회에서 상을 탄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성의 없게 응, 잘했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영은 내게 강의 자리 하나 알아봐 줄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나는 두 손에 턱을 괴며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밖으로 하얀 반바지에 민트색 여름 니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지나갔다. 더운 날씨에도 가까이 붙어 걷고 있는 남자는 여자의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여자를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 역시 연일 그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좌우로 리듬감 있게 흔들리는 여자의 엉덩이를 보며 남자를 홀리려는구나, 생각했고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요망한 엉덩이 같으니라고. 바지 터지겠다.” 그 말을 들은 혜인과 지영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며 “너 혹시 부러운 거야?” 했다. 나는 당황스러워 요망하다는 말이 어찌 그렇게 들리냐고 화를 냈다. 


  혜인과 지영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대놓고 부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라며 요란하게 웃었다. 마침 지영이 자기도 이제 몸매 관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자 혜인은 엉덩이를 예쁘게 만드는 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엉덩이 따위에 신경 쓰는 게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혜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화가 끝나갈 즈음 나를 가볍게 흘겨보면서 이런 말까지 했다. “너는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잖아. 더 나이 들기 전에 엉덩이 잘 다듬고 애인도 만들어. 우리 유부녀들은 하더라도 몰래 해야 해서 아주 머리가 아프다고. 알았지?” 혜인의 볼에 살짝 홍조가 비쳤다.


  나는 순간 혜인이 남편과 애인을 모두 거느리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 생각에 입을 삐죽이는데, 찻값은 자신이 내겠다며 카운터로 향하는 혜인의 볼록한 엉덩이까지 눈에 띄었다. 몸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맵시가 썩 괜찮아서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불현듯 그 엉덩이를 쓰다듬을 두 남자의 단단한 손이 떠올랐다. 서로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숨결이 거칠어지는 남녀의 모습도. 상상은 현실인 듯 느껴졌고 나는 속으로 구시렁댔다. 꼭 있는 것들이 더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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