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시작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급기야 “아, 모르겠어.” 하며 주저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당찬이가 다가와 내 손을 핥았고, 따뜻하고 간지러운 감촉에 순간 울컥했다. 기분 전환도 할 겸, 당찬이를 데리고 뒷산에나 다녀오기로 했다. 당찬이 털을 쓸어주고 눈곱이 끼었는지도 살펴주었다. 목줄을 채운 다음 턱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당찬이는 늠름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며 내 걸음에 맞출 준비를 했다. 정말이지 기특한 녀석이었다.
바깥바람을 쐬자 기분이 한결 나았다. 당찬이의 걸음걸이도 경쾌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산 초입이었다. 똑바로 걷던 당찬이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찬이를 따라 그 방향을 봤더니 가지, 토마토, 고추 등을 심은 작은 밭이 있었고, 마침 거기 앉아서 꿈실거리던 할머니가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이랑 건너편에 있던 할아버지도 몸을 조금 일으켰다가 바로 옆으로 옮겨 앉았다. 노부부의 엉덩이에 빨갛고 둥근 방석 같은 게 끼워져 있었다. 쪼그려 앉아 일하려면 힘드니까 아예 엉덩이에 부착하고 쓰는 의자인 모양이었다. 그걸 보며 감탄하다가 나도 엉덩이에 보형물이라도 넣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부작용은 없을지, 수술 비용은 얼마나 들지 그런 생각에 빠져드는데 갑자기 당찬이가 똥 마려운 기색을 보였다. 문득 개똥을 밟아야 마땅한 변 교수가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무래도 전화를 넣어보는 게 나을 거였다. 이번 학기는 어렵더라도 다음 학기에는 수업을 꼭 맡겨 달라 부탁해야 했다. 당찬이 똥을 처리한 뒤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근처 나무 그늘에 벤치가 보였다. 그는 신호음이 한참 울린 다음에야 전화를 받았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 당찬이가 얼마나 교육을 잘 받았는지 모른다고, 좋은 교육 기관을 추천해 준 덕분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변 교수는 처음에는 떨떠름한 반응이었지만 당찬이 이야기에 이내 웃기까지 했다. 역시 당찬이를 키우기로 한 건 잘한 일이었다. 나는 분위기가 좋아진 틈에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변 교수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헛기침을 하고는, 그러게 주변 사람들한테 잘하지 그랬느냐고 했다. 뜻밖의 질책에 나는 정색하고 물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변 교수는 “거, 자네 평판이 안 좋아. 사람 이용할 줄만 안다는 말이 학계에 파다해. 학생들 앞에서는 우리가 같이 쓴 논문을 자네가 혼자 다 쓴 것처럼 떠벌렸다며? 학생들이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아. 아무튼 강의 자리 주는 게 주임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에요. 이제 연락 그만했으면 좋겠어요.”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언하듯 시작해 존댓말로 끝낸 것은 어쩐지 나와 거리를 두겠다는 의지 같았다. 분명 누군가 있었다. 내가 자리 잡는 걸 훼방 놓는 누군가가. 퍼뜩 혜인이 생각났다. 내 동기 중에 수학 학계에 그런 소문을 낼 수 있는 사람은 혜인밖에 없었다. 당장에 혜인의 번호를 눌렀다. 혜인은 전화를 받자마자 강의할 자리는 찾았느냐고 걱정하듯 물었다. 가증스러웠다. 나는 변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왜 그랬는지 물었다. 잠자코 듣던 혜인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예전에 학과에서 그룹 활동할 때 모두들 너랑 같은 팀 하기 싫어했던 거 몰라? 내가 너 슬그머니 끼워주고 그랬잖아. 그랬는데 너는 내가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의심하는구나?”하고 말했다.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랬다, 나는 대학에 다닐 적부터 혼자였다. 그나마 나를 챙겨준 건 혜인이었다. 나는 그 당시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혜인이 착한 척하면서 선배와 동기들에게 인기를 얻는 위선자 같아 배알이 뒤틀리기도 했다. 내 침묵에 혜인은 이런 말을 던지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를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 줬다는 건 고맙게 받아들일게.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니, 나는 아니거든. 그거 알아? 너, 생각하는 수준이 완전 철없는 어린애 같아.”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전남편에게서도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어쩌다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나더러 세상 모든 일을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어린애 같다고 했다. 전문가와 상담이라도 받아보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제안하기도 했다. 나는 그 말에 버럭 화를 냈었다. 심리상담 따위에 시간과 돈을 들일 생각은 전혀 없노라고, 게다가 나는 지극히 정상이니 필요하면 당신이나 상담을 받으라고. 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내 마음 어딘가가 한없이 미숙하다는 것을. 다만 그가 눈치챘다는 게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혜인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씁, 하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지나가려는 건가 하고 길을 막고 앉은 당찬이를 당기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선 남자는 조금 주저하는 듯 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명함을 내밀었다. 자신을 강아지 전문 사진작가라 소개하면서 당찬이를 데려가 모델로 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받아든 명함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봐요, 저먼 셰퍼드 머리가 매우 좋다는 거 아시죠? 이 개는 주인이 저라는 걸 분명히 기억할 텐데 당신을 따라가리라 생각하세요?” 그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저……, 기분 나쁘게 듣지 않으셨으면 합니다만 저먼 셰퍼드는 말이죠, 주인이 아니라 핸들러에 충성하는 스타일입니다.”
숨이 컥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교육기관에서 데려오던 날 당찬이가 내게 오자마자 잘 따랐던 게 이해되는 동시에 열이 치밀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꼭 전화를 달라며 다급하게 외치는 그에게 보란 듯이 명함을 구겨서 등 뒤로 던졌다. 이미 전남편을 다른 이에게 빼앗겼는데 당찬이까지 빼앗길 수는 없었다. 순간 흠칫 놀랐다. 내가 전남편을 충성스러운 반려견처럼 여겼던 걸까? 나는 아니야, 아니야, 하고 중얼거렸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뎠고 비탈길에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시울이 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