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괜찮은 작가 imkylim Aug 23. 2024

소설_우롱차의 기습3화

  나는 그 이튿날도 딱히 할 일이 없어 텔레비전을 켰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즉석에서 요리 대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 나오는 중이었다. 마침 출출했고 도전해 보고 싶기도 해서 냉장고를 열었다. 며칠 전 구입한 양파, 김치, 달걀이 보였다. 냉동실에는 맥주 안주로 먹던 오래된 멸치가 있었다. 퍼뜩 멸치국수가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찬장을 열어보니 언제 사놨는지 기억나지 않는 마른 소면도 한 봉지 있었다. 얼씨구나 하고 손뼉을 쳤다. 시간을 재면서 열심히 국수를 만들었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셰프들처럼 재빠르게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다. 면발이 쫄깃하고 국물은 시원했다. 내가 직접 해 먹었던 음식 중 단연 최고였다.


  멸치국수를 입에 가득 넣고 기분 좋게 우물거리는데 수년 전, 연구소 사람들과 영화 쿵푸팬더를 관람한 날이 떠올랐다.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다 함께 국수와 만두를 먹었다. 그때 한 연구원이 나에게 주인공 포를 닮았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연구원들도 그런 것 같다며 와르르 웃었다. 아마도 넉넉한 몸집과 빠르게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고 그랬겠지만, 나는 나에게 쏠린 시선에 귀까지 달아올라 손만 내저었다. 그 뒤로 혼자서라도 쿵푸팬더 시리즈를 모두 챙겨 봤다. 포의 멋진 활약은 물론 포가 사랑받는 장면을 볼 때면 매번 알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었다.


  국물까지 비우고 두둑해진 배를 쓸어내리는데, 문득 사부 우그웨이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포에게 따스하게 말을 건네던 부분이 떠올랐다. ‘과거 속으로 사라진 어제는 히스토리, 신비로운 내일은 미스터리, 오늘은 선물’ 지난 수년간 나는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미스터리, 오늘은…… 일종의 언어유희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김 씨가 준 선물, 우롱차가 생각났다. 홀연 뜨거운 물에 펼쳐지는 찻잎처럼 가슴 한편이 따뜻하게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김 씨가 국숫집을 운영하고 싶다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아직 멸치국수의 온기가 남아있는 그릇을 양손으로 감싸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선물, 김 씨, 국숫집, 그리고 내가 만든 맛있는 멸치국수. 어렴풋이 연결고리가 느껴졌다. 곧이어 만화영화 속, 포를 사랑하는 손님들이 가득하던 활기찬 국숫집의 장면에서 포의 자리에 나를, 거위 아빠의 자리에 김 씨를 넣어보았다.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찾았다. 그리고 주거래은행 앱을 열어 내 저축액을 확인했다. 김 씨가 눈여겨보고 있다는 자리에 식당을 꾸미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작은 사업을 벌일만한 돈은 될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김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조만간 만나자 했다. 통화를 마치고야 나에게 이런 대담한 면이 있었다니, 하고 놀랐다. 괜히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김 씨를 오마카세로 유명한 일식집으로 불러냈다. 예전에 본사 임원진이 우리 연구소에 방문했을 때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식당에 나타난 김 씨를 보며 나는 다시금 거위 아빠를 떠올렸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김 씨에게 국숫집을 같이 운영해 보면 어떨지, 하고 운을 떼었다. 김 씨는 놀란 듯 어깨를 움찔하더니 쥐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어 물을 천천히 마신 뒤 냅킨으로 입 근처를 닦았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코 근처를 긁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언저리를 비볐다. 하기야 누가 나 같은 사람과 동업하고 싶겠나…… 후회가 밀려왔다.

이전 08화 소설_우롱차의 기습2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