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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Aug 22. 2024

소설_우롱차의 기습2화

  냉장고 돌아가는 기계음만 들리는 캄캄한 집에 들어서자, 유난히 적막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보며 웃던 김 씨의 환한 표정이 떠올랐다. 역시 집에 도착했을 그는 반갑게 맞아주는 아내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 같았다. 가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잘 챙기는 만큼 그를 찾는 사람도 분명 많을 터였다. 외로움이란 주변머리가 없어서 낯을 가리고 외곬으로 연구실에만 있던 나한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텅 빈 주방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나무 상자를 꺼냈다. 나뭇결이 아름답고 표면이 매끄러워서 한참을 쓰다듬다가 상자를 열었다. 멋들어진 흘림체로 무이암차라 적혀 있는 다갈색 차 봉지 두 개가 보였다. 늦은 저녁이지만 차 맛을 보고 싶었다. 전기 포트에 물이 끓는 동안 찻잎을 흰 머그잔에 넉넉히 담았다. 잔에 물을 붓자 진한 차 내음이 수증기와 함께 올라와 나를 감쌌다. 그리고 마른 찻잎이 서서히 펼쳐지며 더욱더 그윽한 향을 뿜어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잔을 기울이자 찻잎이 치아와 입술에 들러붙었다. 뱉어내다 씹힌 찻잎에서 씁쓸한 맛이 났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김 씨는 내게 당연히 다기, 하다못해 차 거름망이 딸린 찻잔쯤은 있을 거라 믿었기에 이런 귀한 차를 선물했을 터였다. 내가 살아온 삶에 참으로 갖추지 못한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어머니가 떠오르면서 한숨이 나왔다.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대기업 연구소에 취직해 어머니를 기쁘게 했지만 마흔이 넘어가면서는 아니었다. 혼자가 편하다는 내 말에 어머니는 이마를 짚으며 에고, 저놈 옆에 야무진 색시라도 있어야 내가 편히 눈을 감을 텐데, 하고 한탄했다. 나는 끝끝내 어머니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눈을 끔뻑이는데 문득 배 근처에 오래된 얼룩이 보였다. 깨끗하고 좋아 보이는 것으로 골라 입은 게 이 모양이라니, 한심했다. 동시에 김 씨의 말끔한 옷차림이 생각났다. 나와 달리 그는 오늘도 잘 다려진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산에 오른 적도 없으면서 관리하기 쉽다는 이유로 등산복만을 고집하는 내 행색이 더욱 추레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가 언제나 빈틈없고 젊어 보이는 것은 함께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뒤로 며칠간 나의 머리는 김 씨로 가득했다. 그는 친구 같은 관계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에게 만나자고 먼저 연락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특별한 용무도 없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나 싶어 문자를 넣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차 잘 마셨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이런 내용이면 무난할 터였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연락할 마음조차 포기하려던 즈음 김 씨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퇴직한 다음을 생각하다 가슴이 조금 답답해서 그러는데, 술 한 잔 함께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당장 그날 저녁에 만났다. 김 씨는 술잔을 몇 번 기울이고서야 조심스레 속내를 꺼내놓았다. 딸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몇 년째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으며 아들은 제대한 뒤 복학을 준비 중이라 했다. 그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아내가 힘겨워 보여도 차마 그만두라는 말을 못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강 박사님이 참 부럽네요. 일을 그만두고 그냥 쉴 수 있잖아요. 저는 당장 내년부터 작은 사업이라도 해야 하는데, 사업을 벌일만한 돈도 없어요.”하고 한탄했다.


  나는 넌지시 생각하고 있는 사업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담한 국숫집을 하나 차리고 싶다고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신규 상업지구 입구에 적당한 자리가 하나 있는데 마침 아는 사람 건물이라서 월세도 낮게 주겠다고 한다며 눈을 빛냈다. 그러나 곧이어 그렇게 좋은 기회이지만 아이들 학비 때문에 빌린 돈이 많아 대출이 마땅치 않다고 했다. 또한 친구나 친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그들에게 돈 부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주억거리며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는 내 얼굴에 걱정이 그득했나 보았다. 그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양손을 비비며 입꼬리를 올리더니 나에게 맥주 한 잔을 더 권하며 말했다.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봅니다. 박사님, 신경 쓰지 마세요. 아직 일 년은 남은 일입니다. 어떻게든 되겠지요.” 김 씨는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슬퍼 보여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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