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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Oct 23. 2023

7-2. 모세_주님을 마주 보고 사귄 자

: 불타는 떨기나무/가시덤불


산드로 보티첼리, <모세와 이드로의 딸들>, 1482년, 프레스코, 348.5 x 558, 시스티나 예배당 측벽, 바티칸


이집트 궁정에서 자라난 모세는 어느 날 노역장에 나갔다가 이집트 사람이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고 말았다. 두려움에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한 우물가에 도착한다. 사제의 딸들이 양 떼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다른 목자들이 방해하자, 모세는 그들을 내쫓고 딸들의 양 떼에게 물을 준다. 모세는 결국 사제 이드로와 함께 지내다 딸들 중에 치포라(십보라)를 아내로 맞고 아들도 낳으며 광야의 목자로 40년을 산다. 성경에는 몇 줄로 짧게 요약되었지만, 광야에서 목자로 지낸 40년은 민족의 목자로 성장케 한 연단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어느 날 양 떼를 몰고 호렙산에 간 노구의 목자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난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한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모세와 이드로의 딸들>은 이 모든 과정을 담고 있다. 오른쪽에 모세의 살인과 도망으로 시작해서 중앙 우물가에서 딸들을 도와주는 장면이, 왼쪽 상단에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난 하느님을 만나는 모세가 묘사되었다. 그 아래는 이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는 장면도 포함되었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탈 3, 2)

 


<불타는 떨기나무>, 6세기, 모자이크, 성카타리나 수도원, 시나이, 이집트 (이미지 출처 아래 사이트)


모세가 호렙산(시나이산, 시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경이로운 장면은 많은 미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실제 이집트 시나이산에 있는 수도원 성당을 장식한 6세기의 모자이크를 만나보자. 오른쪽 떨기나무에서 불길이 솟아오르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아 덤불은 여전히 푸릇푸릇하다. 신기한 광경에 모세가 가까이 다가가자, 위쪽에 하느님의 손이 “모세야, 모세야!” 부르신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 3, 5) 이에 모세는 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며 신고 있던 샌들을 벗고 있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천사가 불타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솟아올랐다 묘사했지만, 여기서는 중세의 일반적인 표현대로 하느님의 손으로 신의 현존을 나타냈다.


떨기나무는 키가 작고 밑동에서 잔가지를 뻗는 관목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 이집트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카시아과의 키 작은 가시덤불을 가리킨다. 열악한 환경에서 연명하는 이 나무는 볼품없는 잡초로 여겨진다. 이런 나무에 연소되지 않는 불길로 나타나신 하느님은 고통 중의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표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거룩한 장소에서 신발을 벗으라는 하느님의 지시는 우리의 통념으로는 낯설어 보인다. 일부 동방의 사제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거룩한 성소에 더러운 것을 묻혀 가지 않기 위해 맨발로 예배를 집전하기도 한다. 유목민들에게 신발은 중요한 재산이었고 이집트 문화에서 신발은 신분과 권위를 상징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사회적인 자아와 과거를 벗어던지고 숨김없는 상태로 나아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집트 시나이산에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당과 제단 뒤쪽 모자이크 장식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수도자들은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호렙산을 찾아 모여들었다. 현재 시나이산(시내산)으로 불리는 이곳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시나이반도 남쪽 끝부분에 위치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독실한 어머니 헬레나는 이곳에 경당을 세우게 했고, 이후 6세기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곳을 성 카타리나 수도원(St. Catherine’s Monastery)으로 확충하며 모세의 떨기나무(추정)를 보호하는 성벽도 세우게 했다. 험한 바위산과 광야로 둘러싸인 이곳은 또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과 초기의 이콘화가 보관된 명소였기에 수많은 순례객을 끌어모았다. 성당 내부를 장식한 모자이크도 유명하다. 제단 앱스(성당 동쪽에 반원형 부분)에는 그리스도의 변모가, 그 위는 살펴본 <불타는 떨기나무>와 <십계명을 받는 모세>가 묘사되었다. 이 오래된 모자이크는 최근에 복원되면서 원래의 색채와 광휘를 되찾았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과 2016년 모자이크 복원 프로젝트에 관해서는,

https://ccaroma.org/project/monastery-of-st-catherine/3/



디에릭 부츠, <모세와 불타는 떨기나무>, 1465-70년, 패널에 유채, 44 x 36cm 필라델피아 미술관

15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디에릭 보우츠(Dieric Bouts, 1415~1475)의 그림에서 이제 모세는 광활한 초원에 위치해 있다. 중경에는 양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모세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신발을 벗는다. 전경에 타오르는 떨기나무 사이로 하느님은 한 손으로 축복의 손짓을, 다른 손은 천하만물의 창조주임을 나타내는 투명한 구체를 들고 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 3, 6)라는 말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린다. 맨발 옆에 놓인 지팡이가 눈에 띈다. 다음 그림에서와 같이 지팡이는 주저하는 모세에게 하느님이 보여줄 징표와 능력을 암시한다. 풍경은 정교한데 두 시점이 한 화면에 표현된 그림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언어가 함께 사용되었다. 작은 이 성화는 실내를 장식하며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는 신비로운 순간을 묵상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 3, 7)


이스라엘의 신은 숭배의 대상이었던 고대 근동의 신과 다르게 인간의 삶과 고통에 동참하는 신이었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라고 명하셨을 때, 80살의 목자는 그 소명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항상 함께 하겠다고 하시며 최초로 그 이름을 계시한다. 발음도 불분명한 네 글자 YHWH를 가톨릭에서는 야훼, 개신교에서는 여호와로 부르고 있다. 그 의미인 “나는 있는 나다.”(탈 3, 14)는 도대체 무엇을 뜻할까? 개신교 성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 4)라는 번역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개념이 중요했던 그리스 사상이 반영되어 있고 여전히 그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다. 존재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히브리어적 번역은 좀 더 이해가 쉽다. ‘나는 여기에 너희를 위해서 지금도 미래에도 함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름은 동사이고 시간을 초월한 진행의 의미를 품고 있다. 이름의 계시를 통해 이제 하느님의 인격과 본질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명 관련해서 성경과외 해주는 신부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AYzqdYh9WNQ&list=PL4c107IszdpOUBm9X8lnvBJYdrEMEvTuJ&index=12 )  



니콜라 푸생, <모세와 불타는 떨기나무>, 1641년, 캔버스에 유채, 203.7 x 170.8 cm, 덴마크 국립미술관, 코펜하겐

프랑스의 고전주의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타원형의 큰 캔버스에 모세와 하느님의 만남을 담았다. 불타오르는 떨기나무 위로 솟아 오른 하느님은 어린 두 천사가 함께 등장해 더욱 위엄 있어 보인다. 불길 때문인지 하느님 주변에서 휘날리는 파란 천도 눈길을 끈다. 양팔을 벌린 하느님은 한 손은 모세를, 다른 손은 저 멀리를 가리킨다. 이 손짓은 모세에게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암시할 것이다. 깜짝 놀란 모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몸을 일으킨 뱀이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오기까지 지침을 상세히 알려주고 그래도 걱정하는 모세에게 여러 징표를 보여주셨다. 푸생의 그림은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는 말씀대로 행하니 그것이 뱀이 된 순간을 보여준다. 불의 열기 속에서 하느님의 등장은 물론 기적과 놀람이 교차하는 장면이지만, 인물들의 우아한 자세와 삼각형의 균형 잡힌 구성은 고전 조각의 무게와 고요를 내뿜는다.


하느님의 지시대로 모세가 꼬리를 잡으니 뱀은 도로 지팡이가 되었고,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니 나병에 걸렸다가 다시 제살로 돌아오는 이적을 행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모세가 말솜씨 없는 자신을 한탄하자, 하느님은 말 잘하는 형 아론을 대변자로 세워주고 함께하며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결국 모세는 하느님의 지팡이를 들고 가족과 함께 이집트를 향해 떠난다.



마르크 샤갈, <모세와 불타는 떨기나무>, 1966년, 캔버스에 유채, 195 x 312cm, 국립마르크샤갈성서박물관, 니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고 소명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긴 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2, 3m의 캔버스는 온통 파랑과 초록의 모호한 공간으로 채색되었다. 중앙에는 성경의 묘사처럼 불타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솟아 오른 주님의 천사가 양팔을 벌려 모세를 부른다. 주변에 무지개처럼 다채롭게 빛나는 광채는 노아에게 약속하신 보호와 희망을 암시한다. 오른편에 양 떼를 몰고 온 모세는 긴 수염을 가진 노인 목자다. 맨발에 몸을 낮추고 한 손을 가슴에 올린 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모세의 머리에는 뿔 같은 광채가 솟아나고 온통 하얀색으로 채색되어 신적인 영성을 내뿜고 있다. 주저하고 회피하려는 모세가 아닌 민족의 지도자로 준비된 모습처럼 보인다. 모세 위로 훨훨 날고 있는 새는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암시한다.  


왼쪽에는 노란 모세의 얼굴 뒤로 수많은 군중이 뒤를 따른다. 파란 배경 여기저기에 보이는 물고기의 흔적은 이곳이 바다임을 알려준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홍해로 무사히 건넜지만, 중간에 하얀 구름 기둥 뒤로 병거와 무기를 들고 뒤쫓던 이집트 군대는 물이 덮쳐 몰살당한다. 노란 광채를 내뿜는 모세의 얼굴과 십계명판은 뒤쪽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는 사건도 나타낸다. 샤갈의 대작에는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가 광야의 목자로 하느님을 만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율법을 받기까지 탈출기의 긴 드라마가 시적으로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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