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퇴사일기 24화

퇴사가 남긴 것들

퇴사 일기 #24

by 키르히아이스

퇴사한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세미 캐주얼을 입는 나를 발견했다. 요즘엔 캐주얼 복장으로 출근하는 회사도 많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자유 복장인 회사에서도 청바지, 라운드 티셔츠는 무개념의 상징이었다.


나는 이런 과도기의 희생자인가? 선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8, 90년대에는 어떻게 회사에 다녔을까 싶다. 사무실에서 담배 피우고, 회식에서 술 먹이고, 여직원에게 성희롱하고, 상사의 폭력도 있었다고 하니 정말 그때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지금도 이렇게 숨 막히는데 그때는 탈출조차 불가능한 환경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가끔 옛날 드라마를 보면 그런 회사 풍경이 나온다. 컴퓨터가 없는 책상에서 온종일 서류 작업에 몰두하고 장부 쓰느라 여념이 없는 회사. 그 시절 여성들은 더욱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승진은 당연히 안 되는 환경에서 커피 심부름이나 해야 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일부 그런 현장이 있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현실에서 차별이 없어지고 힘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후배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그전 세대의 경험을 배우되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문화를 만들어 가면 된다. 기성세대는 입으로만 신세대를 미래의 희망이라고 치켜세우고 실제로는 어린아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회사의 기존 인력들은 신규직원이 들어오면 자기 자리를 넘볼까 두려워하고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나면 찍어 누르려고 한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있는데 새로운 세대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후배들이 기성세대보다 더 뛰어난 것은 당연하고 선배들도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발전하는 조직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들만의 논리가 있고 다 각자 생각이 있다. 예전처럼 어른들만 따라 하는 세대가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태어난 세대로서 각자 영역에서 나름대로 협력하고 일하는 방법을 안다. 윗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사고방식을 무턱대고 기존 틀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고 시대에 맞게 업무든 직장문화든 바꿔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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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현실의 회사에서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조직이 클수록 자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온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으니까 이제 한번 바꿔보시죠? 언제까지 먼지 묻은 교본만 붙들고 있을 겁니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할 수 있잖아요."


이렇게 말하면 분명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거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네 일이나 똑바로 해.”

"너는 생각이 있냐?"


다 똑같은 뜻인데 표현만 다르다. 변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조직이 커지면 이런 식으로 경직성이 커지기 때문에 혁신이 어렵다. 장담컨대, 모든 기업이 혁신을 말하지만 기업이 말하는 혁신의 상당 부분은 ‘보여주기’이다. 실질적인 것이 없다. 강력한 상명하복의 구조 속에서 전전긍긍할 뿐이다. 어느 분야건 마찬가지이다. 창의력이 필요한 회사에서도 오로지 위에서 결정하고 지시만 내려온다. 직원들의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회사 규모가 커짐에 따라 경직성이 증가하는 것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나라만큼 심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창업이 활발한 미국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회사들이 혁신을 만들어내고 있다. 혁신적인 인재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기업 공채에 합격하는 게 아니라 자기 회사를 차려 마음대로 도전해보는 것이다. 페이스북, 애플, 테슬라 같은 회사들은 다 그렇게 탄생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기존 서비스에 신규 기능을 넣자고 아이디어를 내면 흔히 돌아오는 반응이 있다.


"그게 이용자가 몇이나 되겠어? 지금 있는 서비스도 이용률이 저조하잖아."


나는 이렇게 받아치고 싶다.


"고속도로 만들려면 차가 많아야 합니까? 도로가 있고 활용도가 높아야 차를 살 거 아닙니까?”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에 차도 없는데 무슨 고속도로냐고 반대가 심했는데 그런 일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도 벌어진다. 사람들은 실패에서 배운다고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배우는 법이 없다. 혁신에는 저항이 따르고 그 저항의 정점에는 기존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가 있다.


퇴사 후 내 물건들을 챙겨 왔는데 대부분 책이었다. 그런데 책 말고도 약이 좀 많아서 놀랐다. 회사에 다니면서 상비약으로 두통약과 감기약을 가지고 있었는데 감기약이야 집에서도 요긴하게 쓰지만 두통약은 정말 볼 때마다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 군대 영장을 본 기분이 든다. 앞이 깜깜하고 답답했던 그때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이제 쓰지 않는 두통약을 작은 주머니에 담아서 서랍 속 깊이 넣어두었다.


퇴사를 하면 그때 비로소 ‘내 사람들’을 알게 되는데 내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의 퇴사를 즐거워하며 형식적인 안타까움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내 사람들은 퇴사 후에도 연락이 온다. 물론 퇴사 후 인간관계가 장기간 이어지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 사람이었던 사람은 시간이 지나 몇 년 만에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반갑게 인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해관계와 무관하고 좋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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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하고 나서 비로소 회사의 위력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의 능력인 줄 알았던 것이 알고 보니 회사의 능력이었다는 것이다. 회사는 조직이고 소속감을 준다. 그리고 그 조직이 주는 사회적 보증도 크다. 회사에 속해 있을 때의 ‘나’와 혼자로서 ‘나’는 사회적 평가와 시선이 다르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회사의 능력을 나의 능력으로 착각하기 쉽다. 즉 어떤 일을 할 때 회사의 역량으로부터 도움받는 측면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기업, 공공기관에서 일하다가 퇴사 후 사업체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회사를 나와보니 ‘나'라는 사람의 능력이 상당 부분 회사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 능력이 우수하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퇴사하기 전에 그것이 과연 나만의 능력인지 회사의 도움을 받은 것인지 반드시 체크해 봐야 한다.


퇴사 후에 심정적으로 깨닫는 것도 있다. 내가 무직자라는 것 때문에 자신감도 떨어지고 남들에게 괜한 업신여김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범죄 기사가 났을 때 범인이 무직자라면 우리는 "그러면 그렇지"라고 말한다. 우리들 스스로가 그런 의식에 길들여 있는 것이다.


물론 소속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비교적 안정적 생활을 하니 범죄에 유혹에 빠질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 시선이 자신에게도 속박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정말 회사가 필요로 해서 다니는 게 아니라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서 억지로 다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회사나 조직의 의미는 많이 퇴색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IT 산업이 가져다준 혜택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개인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아지면서 개인의 존재감이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이다. 예전처럼 꼭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생계를 유지할 길이 있기 때문에 조직이나 단체에 예속되지 않고 개인으로도 충분히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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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성공한 유튜브 방송 진행자들은 억대 수익을 올리고 있고 앱 개발자, 웹 소설가, 작곡가, 개인투자자, 쇼핑몰 운영자 등 많은 직업이 개인에게서 창출되고 유지되고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이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개인의 가치 발전이 곧 인류 역사의 발전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블록체인 기술은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들고 있다. 암호화 화폐는 원격지에 있는 개인들이 사업에 참여해 수익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이런 산업들이 실리콘 밸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폐쇄적인 우리나라 산업 환경을 생각하면 단기간에는 쉽지 않겠지만 알파고가 시대에 뒤처진 우리 현실에 경종을 울렸듯이 결국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고통 속에 강제로 변화하는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이런 점을 생각하고 회사보다는 개인을 선택한 것이다. 회사에서 내 역량을 펼쳐보고자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결혼해서 커가는 아이만 보면서 마취 주사를 맞듯이 꾹 참고 살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나와 맞지 않았다. 하루를 살아도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제 사회는 개인이 성공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고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이다. 그 기회를 잡는 사람이 앞서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퇴사 후에 여러 가지를 알게 되지만 조직의 불합리에 대해 저항하고 내 생각을 회사에 설명하는 데 쏟을 에너지를 나를 위한 수익 창출과 즐거움에 쏟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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