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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Mar 28. 2019

25. 데이트 폭력

데이트 폭력

 데이트 폭력은 연인간 폭력을 말하는데 일반적인 폭력과 달리 관계에서 오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데이트 폭력을 굳이 카테고리화 시켜서 문제 삼는건 명백한 폭력임에도 서로 연인관계이기때문에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폭력을 당하는 당사자도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어디까지를 폭력으로 볼 것이냐가 문제인데 이 책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주로 다루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데이트 폭력의 범위를 너무 확대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된다고 본다. 많은 남자가 데이트 폭력을 저지른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여자 친구가 누구와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 옷차림 간섭 등도 폭력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남녀를 떠나 사귀는 관계에서 이런 간섭이 한 번도 없는 커플은 없었을 것이다. 


 남성은 남성의 방식으로, 여성은 여성의 방식으로 상대에게 간섭을 한다. 그것이 강제성을 띤 강요,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위협이 될 때 폭력이 되는 것이지 무조건 폭력은 아니다. 이런 논리라면 여성이 남성에게 데이트 비용이나 선물을 사게 만드는 것도 다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진흙탕 싸움은 하지 말자.


 일부에서는 단순히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데 데이트 폭력 이슈를 이용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을 성의 문제로 접근하지 말고 인간대 인간의 관계로 접근하면 문제의 본질이 의외로 쉽게 드러난다. 데이트 폭력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고 사랑의 관점에서 이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살펴보자.


데이트 폭력의 원인 1. 주도권의 차이

 제3자가 보기에는 당사자가 데이트 폭력을 왜 참고 있는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때릴 수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연인 간에 폭력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폭력을 행사하는 쪽만 보면 폭력을 통해 상대방에게서 양보를 얻어내거나 존재감을 얻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 


 사랑이라는 것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끄는 사람과 따라가는 사람으로 나눠진다. 양쪽이 동일하게 사랑을 주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누구 한 사람은 적극적이고 누군가는 소극적이다. 한 사람이 너무 적극적이면 다른 사람이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고 나중엔 그것이 굳어져 습관이 되어버린다.


 이런 관계 속에서 적극적인 사람은 주도권을 쥐고 상황을 이끌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상대에 대해 편하게 생각할 수 있다. 예전에는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보다가 계속 주도하는 사람의 의견을 따라준다면 나중에는 물어보지 않고 결정하게 된다. 그러다 정말 한번 먹고 싶은 걸 얘기하더라도 이제는 들어주지 않는다. 주도권을 쥔 입장에서는 타인의 의견을 듣는데 익숙하지 않으므로 그 과정을 귀찮게 생각하게 된다.

 늘 양보하거나 뚜렷한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무신경하게 대하는 것이 습관처럼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조차도 자기 생각이 없는 게 아니다. 그저 누가 결정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이런 관계에서 폭력이 생기는 것은 항상 따라오던 사람이 자기 의사를 표시하면서부터이다. 지금까지 굳어져온 자신의 주도권을 무시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자존심 상해하고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사랑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말했는데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함이다. 


 기울어진 관계가 모두 극단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는 관계는 당신을 위해서도 사랑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주도하는 사람은 끌려오는 사람을 무시하기 쉽다. 그런 무시 속에서 폭력이 등장한다. 강제로라도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데이트 폭력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 자신을 너무 소중히 여기거나 반대로 지나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이 경우 사소한 일도 상대에 대해 과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주로 여성에게서 후자는 주로 남성에게서 나온다.


 데이트 폭력에 여성이 무슨 상관이냐고 묻겠지만 시대가 많이 바뀌어 폭력의 주체가 여성이 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여성이 남성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때는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아 위험성이 있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행사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용인할 수 없는 짓이라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그러나 여성이 행사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여자가 때려봐야 얼마나 때리겠어.”,”남자가 좀 받아주면 안 되나” 이런 식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폭력의 주체가 된 여성도 폭력을 가볍게 여기고 남성의 고통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않는다.


 남녀관계에서는 보통 남성이 여성을 배려할 일이 많다. 어쩔 수가 없다. 연애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안다. 남이라도 여성에겐 배려가 필요하다. 하물며 사귀는 관계에서는 훨씬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 남녀평등 같은 얘기는 여기서 일단 접어두고 논의를 진행하자. 


 이런 배려 관계에 익숙해지면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가정에서 과보호를 받은 사람들은 지나친 자기애로 인해 타인을 무시할 가능성이 높다. 나의 고통만 생각하고 남의 고통은 외면하는 것이다. 너는 남자이니까 내게 배려하는 게 당연하다. 그 정도 고통은 얼마든지 참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하는데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하니까 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만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오히려 그 사람의 고통이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즐거우면 모두가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오로지 받는 사랑에만 집중된 사랑인 것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랑이란 균형이 중요하고 오로지 받기만 하는 사랑은 이래서 문제가 많다.


 이것이 폭력으로 넘어가는 단계는 처음에는 심하지 않다. 아이의 응석과 비슷한데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관심 끌기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자해나 물건을 부수는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나중에는 직접적인 폭력행사도 올 수 있다. 


 어떤 매체에서 연인인 남자를 깨물고 꼬집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이것은 심각한 애정결핍 증상이다. 애정을 받고 있지만 더 많은 애정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단것에 중독되면 충분히 당분을 섭취했는데도 더 단것을 찾는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면서 확인하고 그가 보이는 극적인 반응에 만족해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세계가 서로 하나가 되려고 하는 일종의 인력과 같은 에너지이다. 우리는 사랑하면 상대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같이 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그런 심리요인이다. 사랑하는데 서로 반대쪽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 싶어 한다. 단순히 손을 잡는 것보다 손깍지를 끼려고 하고 입맞춤보다는 프렌치 키스를 하려고 한다. 


 오로지 종족보존에 목적이 있는 동물의 스킨십과는 차원이 다르다. 동물에게는 단순한 터치나 짝짓기가 있을 뿐이다.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종류의 스킨십이 있는 것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깨물고 꼬집는 것도 폭력이다. 행위가 작을 뿐이다. 처음에는 일체감을 느끼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갈수록 상대의 반응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디즘(가학적) 성향으로 바뀔 수 있다. 나중에는 목적은 없어지고 껌을 씹듯 오로지 습관적인 유희로 남을 것이다. 

데이트 폭력의 원인 2. 열등감

 열등감도 데이트 폭력으로 발전하는 요인인데 이것은 정신적인 병인이 있다고 본다. 굳이 연인관계가 아니라도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폭력으로 발전할 소지가 많은 사람이다. 처음에 사랑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지만 사랑이 진행될수록 자꾸만 더 큰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이 어느 단계까지는 상향곡선을 그리지만 무한히 커질 수는 없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 현대인에게 일방적인 헌신은 있기 어렵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못 견딘다. 오로지 나에게만 헌신하길 바란다. 남성에게 이런 경향이 많은 이유는 독점욕과 인정 욕구 때문이라고 본다.


 남성이 여성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원시상태에서 남성은 자신의 2세가 정말 자신의 아이인지 보장받을 방법이 없다. 2세가 태어났을때 그게 누구아이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엄마밖에 없다. 물론 더 많은 남성이 관여된다면 그것조차 어렵겠지만. 아무튼 남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이인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남자를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현대에 와서 이런 행동은 큰 의미가 없지만 본능에 잠재된 독점욕은 지울 수 없다. 이런 독점욕이 일부 남성에게서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이것이 열등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사귀고 있는 여성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거나 사회로부터 열등 인간으로 취급받는다고 인식할 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여성을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할 이유가 없다.


 군 복무 중 수십 차례 여자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고 쉴 틈 없이 면회를 오게 하는 남자가 있었다. 군 복무 중이라 불안감이 컸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 남자는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도 그랬다. 여자 친구의 휴대폰 속 남자 연락처를 모두 지워버리고 사진 속 남자가 누군지 캐물었다.


 그 남자는 변변한 직업이 없었는데 여자는 비교적 착실해서 어디서든 인정받는 스타일이었다. 추측이긴 하지만 남자는 사회에서 받은 무시와 진로에 대한 불안감을 여자 친구에게 투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여자가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거나 이 여자마저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럴수록 여자에게 더욱 큰 관심을 요구하고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화를 냈다.


 이런 식으로 열등감이 데이트 폭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열등감은 자존감 부족인데 자존감이 과해도, 부족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사랑은 서로 부족한 면을 채워주는 역할도 하는데 한쪽이 현저히 부족한 면을 가지고 있다면 사랑으로 그것을 다 채울 수가 없다. 


 그리고 폭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문제인데 아직도 미디어에서는 종종 연인관계에서 따귀를 때리거나 강제로 키스하는 것 같은 것을 로맨틱하게 묘사한다. 두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사랑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두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사랑을 이끌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폭력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고 폭력을 써야 할 정도라면 이미 그 관계는 끝난 것이다. 데이트 폭력이 선진국이라고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굳이 카테고리화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 이유는 폭력을 굳이 데이트 중에 했다고 분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데이트 폭력을 참는 이유

 문제는 이런 폭력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폭력을 당하고도 참는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일부는 상대를 교화시키겠다거나 몇 번은 참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폭력에 관해서는 더 많이 행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만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필히 폭력자가 되고 나중엔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된다. 초기에 문제를 바로 잡지 못한다면 결론은 이미 지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폭력을 행사해도 참는다면 건강한 사랑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폭력행사를 그만두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신을 이미 동등한 연인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폭력으로 또 다른 만족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폭력의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한 번이라도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고체계가 쉽게 멈추고 동물의 본성이 나온다는 뜻이다.


 마음은 아프겠지만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 초반에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 데이트 폭력범들은 사과도 잘하는데 한 번이라도 폭력이 행사된다면 그 관계는 끝내는 게 맞다. 물론 사람 관계가 그렇게 무 자르듯 쉽지 않기 때문에 본인 판단에 따라 사과를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관계의 전환이 필요하다.


 폭력이 행사된 상황에서 전과 같은 관계가 될 수는 없다. 이제부터는 결별을 목전에 앞두고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하는 단계로 전환해야 한다.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번만 하지 않는다. 비슷한 상황에서 그 사람의 반응을 또 관찰해보면 정말로 마음을 고쳐먹었는지는 금방 확인 가능하다. 머릿속에 폭력을 하나의 수단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것을 꺼내게 되어있다. 


 폭력을 행사할 수 없는 사람은 애초에 그것이 수단 목록에 들어가 있지 않아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것을 꺼낼 수 없다. 차라리 맞으면 맞았지 때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의 머릿속에는 폭력이라는 솔루션 자체가 없으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폭력행사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 사이에는 이만큼 큰 간격이 있다. 사고체계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폭력을 행사한 사람과의 관계는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사고체계가 그럴 소지가 있었고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을 만나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당신이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데이트 폭력에 대해 관대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상남자', '터프가이'등으로 미화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남성성으로 오인되고 있다. 분명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잘 진전되지 않는 남녀관계를 한 번에 진전시키고 여성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든다. 여성이 수동적으로 남녀관계에 응한다면 이런 남자들에 넘어갈 수 있다. 


 이런 남자들이 리더십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고백도 당당하게 잘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도 쉽게 밝힌다. 그렇게 하면 남녀관계를 진전하기가 쉽다. 여성 입장에서는 말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적극적으로 나서기엔 너무 좋아하는 것을 티 내는 것 같고 헤픈 여자로 오인될까 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런 것이 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여성도 적극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밝힐 수 있고 좋아하면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고 여성스러운 것으로 오인되서는 안 된다. 그래야 쓸데없는 상남자들이 없어진다. 남성이 저지르는 데이트 폭력도 여성을 오로지 수동적인 존재로 가둬놓으려는 의지가 작용된 것이다. 


 사랑은 참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어떤 때에는 순한 양이었다가 어쩔 때는 야수의 모습이 된다. 그렇지만 두 가지 모두 사랑의 모습으로 포장된다. 우리는 이런 사랑의 양면성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이미 야수가 된 사랑인데도 눈을 감고 인정하기 싫어하면 야수는 철장을 뚫고 현실로 뛰쳐나올 수 있다.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관리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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