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이정표가 보였다. 길의 방향이나 남은 거리, 다음까지의 거리 등을 나타내는 그런 표식. 나에게 책과 연극과 뮤지컬이 그랬다. 그 이정표를 하나씩 되짚어 보면 나를 볼 수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기가 막히게 내 시간 틈틈이 꽂혀 있는 책과 극을 보면 그 옆에 나란히 그때의 나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어느 여행지에서 산 물건에 그 순간이 담기는 것처럼, 우연히 맡은 냄새와 향기에 그 순간이 스민 것처럼, 그때의 책과 극에 내 속에 박힌 수많은 내가 머물러있었다.
교과서를 처음 받아 들면 국어책부터 펼치던 아이. 그걸 속으로 읽고, 소리 내서도 읽고, 인물을 흉내 내면서 읽으며 여러 번을 읽었다. 가끔 평가를 위해 의무적으로 역할극 활동 따위를 해야 할 때면 아닌 척하면서 열과 성을 다해 준비했고, 정답을 정해놓고 일괄적으로 머리에 입력하는 문학 수업의 방식은 지긋지긋할 만큼 싫었다. 많은 방과 후 수업 중에서 어째서인지 굳이 뮤지컬 수업을 선택했고, 그다지 길지도 않던 수업에서 짧게나마 꿈을 꿔보기도 했다.
모든 게 외로움이었을 때 책이 그 시간을 나눠 들어주었고, 그러면 조용한 시간 속에서 책과 함께 시끄럽게 수다를 떨었다. 그토록 흐르지 않던 시간이 뚝딱거리며 흐르는 시늉을 했다. 돈 없던 시절에도 국립 극장 덕에 연극을 보기도 했고, 친구 따라 ‘대학로’라는 곳도 가보기도 했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배우와 팬들이 복작거리는 그 거리에 호기심 가득한 이방인으로 서 있던 게 어찌나 흥미롭던지. 그래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아르바이트하며 난생처음으로 스스로 번 돈을 가지고 최고의 사치를 부린다고 부린 것이 무슨 다른 것도 아닌 값비싼 뮤지컬 티켓을 구해보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한 배우에게 반했었는데, 사실은 ‘극’이라는 장르 자체에 반했던 게 아닌가, 이제 와서 너스레를 떨어본다.
꼭 수강하지 않아도 될 연극이론 수업을 듣겠다고 설치다가 F학점으로 재수강까지 해놓고, 또 희곡 강의를 수강했다. 집념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집착이나 고집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고, 그냥 끌려서 그랬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것이었는지, 필연을 우연이라고 하고 싶은 건지, 불가항력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이런저런 자기변호 따위의 변명을 찾아보다가, 그렇다. 그냥 (근데 이제 갈 길이 아주 먼) 덕후인 것이다.
무료할 때 생각나는 것, 상처받을 때 숨통이 되어준 것, 힘들 때 힘이 되어준 것, 그래서 힘이 들 때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는 것,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는 것, 어떤 때는 집착에 가까워지는 것, 근데 그게 괴로운 게 아니고 꽤 즐거워서 기분이 묘해지는 것, 괜히 들뜨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는 것, 월요일을 버티는 활력이 되는 것, 돈을 버는 이유가 되는 것, 따로 돈을 모으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 다음이 기다려지는 것, 지금을 앞서 미리 일정을 세우게 되는 것, 그래서 내일을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 결국에는 죽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
나는 여전히 바닥이 없는 바다에 끝없이 추락하곤 한다.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헤엄은커녕 손가락을 까딱하는 움직임도 하지 못하는 채로 가라앉는다. 이 추락의 끝을 알지 못하면서 동시에 추락이 반드시 곧 끝날 것을 확신한다. 끝이 없는 추락이 끝이 날 때까지, 나는 그저 갈라진 바다 틈을 뚫고 들어오는 빛이 내 몸 위에서 살랑거리는 걸 바라볼 뿐이다. 추락이 깊어질수록 아침이 저녁을 지나고 밤이 되듯 온통 깜깜해진다. 어두워질수록 몸은 하얗게 밝아진다. 무게가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손가락 까딱 한 번에 끝이 없던 추락이 끝난다. 고개를 쳐들고 햇볕에 정수리부터 차근차근 식히며 일광욕을 즐긴다. 질퍽했던 살갗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물너울을 응시한다. 또 올 것이다. 그리고 또 갈 것이다.
그저 읽고 있던 책을 이어 읽는다. 미리 예매한 극을 보러 몸을 움직인다. 책이 안 읽히면 멋들어지게 읽는 척이나 좀 해보고, 서점에서 괜히 책을 뒤적이면서 눈으로는 귀여운 물건을 구경한다. 봐야 할 극이 없는 날이면 인터넷에서 다른 극을 찾아보기도 하고, 노래도 찾아 듣는다. 팔랑팔랑 돌아다니는 티켓을 차근차근 티켓북에 그날의 기억과 함께 정리하면서 추억에 잠겨보기도 하면서 정말 좋은 공연이었다며 곱씹어보다가 이 기억들이 날아갈까 봐 짧더라도 나름의 생각이나 후기를 정리해 본다.
그렇다. 그저 어제는 기억하고 지금은 즐기며 내일을 미리 둘러본다. 나에게는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