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지겨웠던 학창 시절, 필사적으로 그들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더 노골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마음이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추상보다는 그저 여왕벌인 저 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나란히 서 있고 싶었고, 가끔은 그 친구의 시선을 따라 나도 내려다보고도 싶었던, 관계 속에 존재하는 하찮은 권력의 변변치 않은 맛을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보다 작은 학교 안에, 더 작은 교실 안에, 더 작은 집단 속에 낙오되고 싶지 않은 생존 본능, 그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꾸몄다. 그들이 좋아할 법한 그럴싸한 모습으로 꾸며냈다. 페르소나였다. 숨겨진 또 다른 자아, 동시에 가짜인 흉내. 살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낙오되지 않기 위해 모조리 나열할 수 없이 더 많은 이유로 기꺼이 꾸몄다.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진짜도 아니었다.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덩어리 진 채 엉켜 붙은 피부와 가면을 정리할 기력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진짜라며 나를 속였다. 처음에는 그들을 속이다 결국에는 나까지 속였다. 그게 정답이었고, 어리석게도 그래야 그들의 작은 마음의 부스러기라도 얻을 영광을 잠깐이라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그 작디작은 집단에서 살고 싶던 악착같은 본능이었다.
나쁜 건 페르소나가 아니었다. 잘 보이기 위해 꾸며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 가면에 스스로의 호흡을 빼앗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가면을 쓴 나의 피부 위로 호흡의 흐름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인지도 모른 채, 조용하고 확실히 페르소나는 나를 간단하게 삼키고 있었다. 질퍽하게 나를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뮤지컬] 쇼맨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자신의 일생을 사진으로 남겨달라는 '네불라'의 요청, 그보다 먼저 들어왔던 그에 따른 꽤 쏠쏠한 대가. '수아'는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작업을 하며 그의 일생을 마주한 수아는 그에게서 소름 돋는 역겨움을 느낄 것을, 그에게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마주할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네불라의 일생은 남들의 주목과 관심, 그들의 웃음 속에서 하는 광대짓, 그에게 최고의 황홀함인 그것들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하다. 정말 그가 그것을 진심으로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을 넘기 시작하면 결은 달라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그도 멈출 수 없을 만큼 그것을 향한 갈증을 느끼고, 결국엔 해서는 안될 비윤리적인 짓까지 해버린다. 바로 독재자의 대역. 그는 그의 대역을 충실하게 해내고, 나중에는 더 이상 하지 못하는 것에 파멸적으로 슬퍼한다. 그는 그 독재자를 향한 광적인 환대를 거절할 수 없었고, 그것들이 그를 살아 숨 쉬게 만듦과 동시에 목을 조른다는 것을 선명히 알고 있었다. 경멸하며 괴로워하지만, 놓지 못한다. 진저리 치며 외면해도 눈을 떼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괴롭힌다. 점점 자신을 삼켜내고 목을 쥐어짜는 페르소나에 그는 모든 저항을 포기한다. 결국 그는 남의 웃음에도 버려졌고, 스스로도 놓아서 버린다.
그깟 페르소나를 벗어내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해서 스스로를 모두 먹혀놓고 결국 모두 갖다 버린 '네불라'의 일생을 마주한 '수아'는 알 수 없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역겨움을 뱉어낸다. 그의 일생은 극도로 비윤리적이었고 이기적이었으며,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이 엉겨있었다. 대가를 이미 받은 수아는 억지로 네불라의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작업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그런 그에게서 수아는 거울로 마주하듯 자신을 직면한다. 벗어나지 못한 끈적한 수아의 페르소나. 그를 향한 이유를 알 수 없던 역겨움은 사실 본인을 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해외 입양아였던 수아는 사랑을 받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양부모는 원하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었고, 수아는 기민한 아이였기에 모를 수 없었다. 양부모에게는 지적장애를 가진 딸이 있었는데, 본인들이 없을 때나 차마 채워주지 못하는 순간들을 수아가 책임져주길 바랐고, 어리도록 어린 수아에게 떳떳이 요구했다. 그러면 수아는 그들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었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가족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굿걸', 수아의 페르소나였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덤덤히 삼켜내는 것, 참아내는 것. 그래서 그에 따른 '굿걸', 그 한마디를 받아내는 것. 그가 버리지 못한, 얼굴에 무겁게 들러붙은 가면을 마주한다.
불안하고 초조해져 갔다. 우스울 정도였다. 나의 중심이 오로지 그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충분히 위태로웠고 작은 손짓에도 휘청거리며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마치 내 피부에 엮어놓은 실이 당겨지는 듯 그들의 말 한마디를, 고갯짓 하나를 날카롭게 살폈다. 너무 미세해서 알아차릴 수도 없는 걸로도 그들은 나는 가볍게 들었다가 내던지기를 반복했다. 속이 바짝바짝 말라 들어가서 쩍쩍 갈라졌다. 갈증이 났다. 차가운 죽음이 생각났다. 머릿속이 너무 건조한 탓이었을까 생각이 나갈 구멍을 찾지 못했다. 튕겨져서 다시 돌아오고 미끄러져서 다시 돌아오며 공간을 맴돌기만 했다. 반복되는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은 항상 꺼끌거렸다. 건조한 피부를 뜯어내듯 스스로 몸에 상처를 냈다. 그러면 잠깐의 숨통이 트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곡예에 발밑은 조금씩 바스러져서 무너지고 있었다.
가면의 무게가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내 속에평온함이 담긴 숨은 없었고 조용한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호흡을 내어줬는데 받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호흡을 잃은 나는 어떤 흐름도, 방향도,작은 짐작도 할 수 없는 망망대해에 작고 낡은 뗏목을 잡고 떠 있을 뿐이었다. 축축한 바닷물이 마른 속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가라앉는 게 두려웠는지, 왜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다른 사람의 파닥거리는 발 따위를 잡고 싶어 했는지, 나의 얼굴을 향해 한가득 털어내는 거품을 왜 다 맞고 있었는지. 발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팔에 힘은 점점 빠지고 있었다.
하찮은 뗏목을 놓고 기꺼이 바다에 뛰어들었던 순간, 피부에 들러붙은 가면으로부터 살갗을 분리했던 순간은 지극히 평범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특별한 경험이 있던 것도, 누군가가 나타났던 것도, 어떤 계시와 같은 것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그 순간, 현실의 나를 노골적으로 직시했던 순간이었다. 저 작고 지겨운 집단을 벗어나자 나에게 끝없이 펼쳐지는 시야와 다각으로 형성되는 관점, 그 시선을 가득 채우는 무한한 공간이 물밀듯 덮쳐 들어왔다. 그 속에서 가면에 짓눌려 온몸이 뭉개지고 짓물러져 바스러진 나를 마주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받아내고 싶었던 것들은 사실은 나에게 바랐던 모든 것이었다. 나는 나의 마음을 얻고 싶었고,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가지고 싶었고, 나의 인정을 받아내고 싶었고, 나를 굳건하게 잡아줄 주체성을 소유하고 싶었다. 온전히 나에게 갈망했던 것들. 한편으론 어리석고 안쓰럽게, 한편으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때의 나는 몰랐고, 가끔은 알면서도 외면하기도 했다. 간단하게 손에 잡힐 듯한 그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첨벙거리는 그들의 발가락을 붙잡고 그들의 무언가로 나를 가득 채우고 싶어 했다. 나를 마주 볼 거울을 그들의 발 거품으로 뿌옇게 맹점들로 가득 채웠다. 그것들이 찰박거리며 채워질 수 있던 나를 조잡하게 비워냈고, 결국에는 건조하고 푸석하게 만들어 바스러지게 할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갈망했다. 그 좁디좁은 게 전부였고 일상에 있던 나에겐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일상적이고 흔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낙오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그 작은 집단 속에서 생존해서 살아가기 불리했으니까.
나를 알아갈수록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다른 면을 알아야 했고, 알 수 있었다. 모든 순간이 흥미로웠다. 무겁게 내리눌러 버거웠던 페르소나를 손에 올리고 진짜 무게를 가늠했다. 내가 가진 또 다른 내가 몇 개인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활용이 되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차근차근 관찰했다. 나를 삼켜내고 먹어대는 게 아니었다. 물들듯 스며들고 있었다. 평온하고 평화로웠다. 온전히 충만하다는 감각, 갈망과 결핍의 본모습은 사실 열정과 애정이라는 것. 나까지 속이던 혼란만이 가득했던 페르소나가 사실은 나의 생존 본능을 이끌어 주던 유능한, 또 다른 나의 자아였다는 것이 나에게 스미듯 다가왔다. 벅찼다.
그때의 나는 달라질 수 없다. 몇 번을 쓰고 고치고 다시 써도 결코 달라질 수 없다. 그때의 나는 그때이기에,일말의 조각도 달라지게 할 수도, 달라질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다르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다르게 만들 순 없어도, 다르게 안아줄 수 있다. 다르게 품고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애틋하게 사모한다. 미련해하고 미워하고 경멸하고 괴로워하고 안쓰러워하다가 결국 충만하게 사랑한다. 스미듯 내가 된 그때의 나의 모든 순간을 누구보다 한없이 경애한다. 달라진 지금의 내가 달라질 수 없는 그때의 나를 다르게 바라보며 새롭게 안아준다. 그거면 충분하다.
난 너야.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나야.
네불라,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을 참아냈나. 페르소나의 밀려드는 무게를 모든 뼈가 바스러지도록 받아내며 놓지 못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나. 네불라를 향했던 질문들이 수아에게, 그렇게 수아에게 도달했던 질문들은 마치 테니스공이 벽이 치고 튕겨나가듯 관객들에게 도달한다.
수아는 마지막으로, 나름대로 준비한 사진을 건네주기 위해 네불라를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단 한 장도 주지 않는다. 대신 그의 순간을 상징할 수 있는 사진을 준다. 그 사진엔 페르소나를 기괴한 표정으로 쓰고 괴음을 내며 몸서리치는 네불라는 없다. 그저 그때의 순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을 보며 자신의 얼굴과 표정과 모습을 생각해 내는 것은 지금의 그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