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뮤지컬] 유진과 유진, 나를 향한 충분한 하나의 대답
사랑해서 상처를 줬던 적이 있나요. 널 너무 사랑해서, 지켜주고 싶어서, 혹은 내가 널 꼭 지켜내야 했기 때문에, 그랬던 나의 사랑이 결국 너에게 상처가 되었던 적이 있나요. 또는 알았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던 적이 있나요. 나도 부모는 처음이라서, 부모라는 모든 순간이 처음이라서 서툰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 엄마, 나도 내 상처는 처음이라서.
같은 사건의 피해자였던 큰 유진과 작은 유진. 시간이 흘러 같은 반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러나 두 유진은 너무도 달랐다. 시끄러울 정도로 천진한 큰 유진과 어딘가 모르게 그늘이 진 채 조용히 공부에 매진하는 작은 유진. 그 사건을 모두 기억하는 큰 유진과 어째서인지 그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린 작은 유진. 엄마와 나란히 앉아 같이 빨래를 정리하고 핸드폰으로 다투기도 하며, 서로 마주 보고 그 사건에 대해 질문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큰 유진과 엄마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삭막한 대화만을 듣는 작은 유진.
너무도 달랐다. 자신의 품에 할 수 있는 모든 힘으로 유진을 가득 껴안은 채, 사건에 전면으로 몸을 던져 싸우고 멱살을 잡았던 큰 유진의 엄마와, 자신의 울부짖음이 가득 울리는 화장실에서 유진의 작은 몸을 구석구석 닦아낸 후, 사건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듯 외면하고 덮어버렸던 작은 유진의 엄마. 낯선 상처를 마주한 그들이 달랐고, 낯선 상처에 닿는 그들의 시선과 손길과 태도가 달랐고, 시간이 흐른 뒤 두 유진은 너무도 달라졌다.
하지만 두 유진은 또 같았다. 큰 유진을 만난 후 기억이 돌아오게 된 작은 유진은 자신을 괴롭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무엇이었는지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다. 숨을 막아 냈던 공포로 가득한 괴물이 선명히 정체를 드러내자 작은 유진의 발밑은 무너져 내리고 방황은 쏟아져 밀려들어온다. 찬란하게 천진했던 큰 유진은 마치 무너질 세상은 없을 듯 보였지만, 자신의 사건을 도와줬던 누군가에게 '저런 아이'라는 단어를 듣자 휘청거리며 한순간에 유진의 발밑이 바스러진다. 허공을 떠도는 두 발을 굴려 달려갔던 곳은 큰 유진과 작은 유진, 서로의 품. 도망치듯 달려온 바다 앞에서 둘은 조용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 속에서 답을 스스로 찾아낸다. 큰 유진의 엄마는 말해주던, 작은 유진의 엄마는 말하지 못했던 그 대답.
너의 잘못이 아니야.
우린 얼마나 스스로의 잘못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사실은 스스로의 잘못이 아닌 스스로를 향한 대답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너의 잘못이 아니야. 맞아. 나의 잘못이 아니야. 이 한마디를 스스로 듣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어야 했고, 그 속에서 나는 많은 생각과 감정을 가득 담아내야 했고, 그보다 더 많은 질문을 나에게 물어보고 또다시 혹시나 하며 의심해야 했고, 그보다 더 자주 흔들리고 휘청거리며 다양한 모양과 깊이를 가진 생채기가 나기도 하는 순간을 떠나보내야 했다. 저 한 마디를 스스로에게 하기 위해, 나에게 하는 저 말을 오롯이 듣기 위해, 목젖을 먹먹하게 묶어내는 눈물을 되뇌고 다시 삼키기를 반복했다. 너무도 간단하고 아무것도 아닌, 저 짧은 말을 듣기 위해서 그랬어야 했다.
지금 보면 너무 작디작아서 한 톨도 되지 않을, 허나 한 때는 전부였던 그때. 그들과 내가 잘 어울리지 못했고, 어울리려고 무단히도 노력을 했음에도 계속 겉돌았을 때, 그래서 너무도 당연하고 합당하듯 그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끊임없이 무시당했을 때, 나는 결코 알 수 없는 수군거림과 창백한 공기가 그들만은 더욱 끈적하게 둘러쌀 때, 계단을 내려가는 나의 머리에 한 아이가 가래침을 뱉었을 때, 거북한 역겨움을 풍기는 그 침을 화장실에서 조용히 닦아 흘려보낼 때, 그래서 너무도 힘들고 무섭다고 별 짓을 하며 나를 괴롭혔을 때, 그러다 결국엔 살고 싶었고 숨을 쉬고 싶어서 모든 것을 엄마에게 털어놓았을 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가만히 나의 손을 잡았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눈물과 함께 모든 응어리를 풀어냈고 쏟아지는 눈물에 무너지는 표정이 범벅된 나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던 엄마는 애써 담담하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 울먹이기도 했다. 나와 한 몸처럼 반응하는 엄마의 대답과 반응들, 짧은 위로들, 가끔은 분노에 미세하게 떨리는 한숨들이 그 순간을 토닥였다. 그렇게 차분히 듣던 엄마는 눈앞에 정신없이 흩어진 나의 말들 속에서, 결국 내 탓을 뒤적이며 찾았다.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내가, 이런저런 노력을 나름 무단히 했음에도 결국엔 어울리지 못했던 내가 그들에게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외면당하고 겉돌았던 것이 그들이 아니고 나였음에도, 그 속에서 괴로웠고 그 고통에 끝없이 스스로를 파먹어 냈던 사람이 그들이 아니고 나였음에도, 엄마는 나에게 뭔가 잘못된 점이 있었으니 그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 잘못된 점을 고쳐서 그들과 잘 지내보려는 노력을 하라고 했다. 참 바보처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 끄덕임은 전혀 이상하지도, 기이하지도, 불편하지도 않게 쉬웠고 힘이 없었다.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파먹어 헤집는 것에 도가 튼 나에게 그 말에 대한 반박은 나의 발밑이었다. 이미 무너져 결코 볼 수 없는 나의 발밑. 나의 말, 말투, 행동, 손끝, 발끝, 숨소리, 눈길, 아니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를 생각하던 아이에게 그 정도의 말은 쉬웠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에 등을 돌리고 몸을 뒤틀어 피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가슴을 내밀어 화살의 촉을 기꺼이 더욱 밀어 찔러 넣는 것. 내 잘못일지도 몰라. 아니 내 잘못이지. 그니까 그들이 그랬겠지.
화살이 나를 향한다. 잘못은 틀림이 된다. 그렇게 틀림은 잘못이 되고, 나는 틀림이 된다. 나의 탓을 찾는 행위는 중독된 듯 계속되고 그렇게 찾은 화살의 방향은 어김없이 스스로를 향한다. 찌를 수 없을 만큼 무뎌진 듯한 화살을 가지고 어떻게든 생채기를 만들어 낸다. 그들이 사라져도 또 다르게 스스로를 괴롭히고 미워한다. 한동안 그 속에서 나는 모든 것에서 내 탓을 찾아내기 바빴고, 그럴수록 더욱 내가 한심했다. 아니, 이것도 내 잘못 아니야?
사랑해서 그랬어. 널 너무 사랑해서, 널 생각해서, 상처받지 않게 널 지켜내고 싶어서, 네가 잘 지냈으면 해서, 네가 이겨냈으면 해서 그랬어. 사실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처음이라서.
바다에서 엄마와 재회한 작은 유진은 엄마의 진심을 듣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작은 유진이 어느새 그때의 엄마와 비슷하게 키가 컸을 때, 담담하게 그때의 엄마를 마주하여 바라본다. 그때의 엄마를 또렷하게 이해하고 알게 되었지만, 울컥하며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지만, 생각하면 느껴지는 시큰한 통증을 모른 척하기엔 어렵다. 나도 선명하게 안다. 나의 엄마가 왜 그랬는지,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렇지만 순간 울컥 감정이 차오르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며 태연하게 지나가기엔 그때의 내가 참 많이 숨죽여 울었다. 무겁게 코를 때리며 목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을 자주 삼켜냈었고, 나중에는 쉽게 삼키는 방법도 나름 터득하기도 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은 잠이 오길 바라는 수많은 뒤척임으로 채웠다. 스스로를 참 많이 미워했고 또 사무치게 외롭게 했다. 이 잘못된 것이, 모든 것이 내 탓 같아서, 내 잘못인 거 같아서, 그렇게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 내 존재 자체가 잘못인 거 같아서, 작은 휘청거림에도 커다란 화살로 나를 짓누르곤 했다. 남에게 한 마디의 말을 하려고 수백 개의 단어를 고르고 수천번을 생각을 하며 되뇌곤 했다. 그렇게 해도 자책하며 나의 탓을 두리번거리면서 찾길 반복했다. 그저 남이 아닌 나에게 단 한마디면 됐을 것을.
이젠 정확히 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잘못되고 틀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오히려 엄마에게 말한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모두에게 말한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 어쩌면 정말 나의 잘못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잘못이 아예 없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어떠한 상처를 줬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무언가를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결코 나는 아무런 감도 잡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어떤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어쩌면 나름대로 그럴싸한 이유와 말들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모를' 일이다. 그니까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이런 정말 모를 일들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날아오는 날 선 화살로 만들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내가 나에게 날려 보내는, 셀 수 없어서 피할 수도 없는 화살로 만들지 않았으면, 이미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스스로 갈가리 찢어낸 그 헤진 마음에 당연히 그냥 지나가는 나뭇가지를 뾰족한 화살로 만들어 기꺼이 가슴에 꽂아 밀어 넣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남 탓을 하는 것보다 내 탓이 하기 쉽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당연히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정말 그것이 모두 당신이 탓이기 때문이라기보단 지금 당신이 충분히 슬픈 상태라는 것이다. 그럴 땐 이미 충분히 많이 작고 약할 테니 그저 가만히 토닥여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