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 이유
네, 그러게요. 아직입니다. 이유는요.
먹고살아야 하는 사회는 좀 더 큰 세상이었다. 다른 관점의 문이 열리거나 발견하는 순간들이 연속되었고, 그 관점의 문들은 오랜 시간이 쌓여 관리가 되지 않은 원목 문짝 마냥 깔끔하지 않고 서로 엉겨 붙어 있는 경우가 잦았다. 신기했고 압박감이 느껴졌다. 대체로 설렜지만 분명 역겨운 부분도 있었다. 넓은 실평수와는 달리 까닥하다가는 좁은 시야가 되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갸륵했고 우스꽝스러웠다.
묘하게 어딘가가 뒤틀린 사람이 모든 면에서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친절한 사람도 어딘가에서는 구린 냄새가 나기도 했으며, 진정한 사람은 말수가 없었다. 칼은 어디서든 항상 꽂힐 수 있지만 차라리 앞에 꽂히는 칼이 뒤에 꽂히는 칼보다 아프긴 해도 후유증은 덜했다. 진실과 진심을 숨기면 겉으로 볼 때 모두가 화목해 보인다는 모순이 만연했고, 그 모습은 정말 멀리서 보면 괜찮아 보이는 착시 현상이었다. 엉성한 그물을 가지고도 희한하게 물고기가 잡히긴 잡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쓴웃음을 짓기도 했고,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영원할 것처럼 손에 쥐고 흔드는 모습에 헛웃음도 나왔다. 미세먼지처럼 떠도는 수다들은 어딜 가나 있었고, 그것들이 나의 귀에 소복이 쌓일 때면 사실 사람은 떠나면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혓바닥에 살아있는 게 아닐까, 그럼 좋은 건가, 다행인 건가, 아닌가 따위의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쌓인 뿌연 수다를 툭툭 털어내면,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사실 시작은 반만 할 뿐이고 전부는 끝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중 무엇보다, 힘든 걸 겉으로 어떤 식으로든 티를 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는 것과 그럼에도 아는 사람은 알아준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감을 모른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 거리감 속에서 결이 맞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 세상이 아직까지 나에게 흥미롭게 해주는 점이다.
이렇게 넓은 평수의 세상을 기왕이면 넓게 헤엄치고 싶다. 기꺼이 온몸을 던져 파도에 부딪히고, 하늘과 맞닿은 아득한 수평선의 끝으로부터 하늘의 대부분을 덮어 오는 커다란 물결에 유연하게 유영 따위를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달고 짜고 쓴 물을 몇 번 들이켜다 보면 새로운 섬들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나의 지도가 넓어진다. 아무것도 없던 망망대해에 그럴싸한 모습을 갖춘 섬이 하나 생긴다. 힘들어 죽겠는데도 즐거운 묘한 쾌감을 느낀다.
당연하겠지만 난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물론 그에 따른 성장통은 여전히 낯설고 역시나 상쾌하거나 청량할 수가 없다.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고, 그럴 수 있다면 무조건 방법을 찾아 피할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피할 수 없다면 바다에 떠 있는 나의 몸뚱이 하나를 생각한다. 이 바닷속에, 파도와 물결 속에 내가 커다란 거름망 그 자체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나에게 좋은 것을 주는 거다. 분명하게 자신하며, 그런 나를 나는 믿는다. 여러 물질과 빛깔, 냄새와 향기, 다채로운 물결의 흐름과 촉감으로 얽히고설킨 것을 차근차근 거른다. 좋은 것이 남을 수 있게, 필요한 것은 잘 삼켜 소화할 수 있게.
가끔 나의 가능 범위를 벗어난 성장 속도는 마음에 튼살을 만들었다. 삼켜내야 하는 파도가 성장하려는 마음을 벗어날 때 어김없이 살이 튼다. 붉은 튼살이 마음을 모두 덮어 하얀 흉터가 되기 전에, 거름망이 엉망이 되어 마음이 혼탁해지기 전에 적절하고 단호하게 처방을 해줘야 한다는 것을 햇볕에 몸을 바삭바삭하게 말리고 나서야 뽀송해진 생각으로 차근차근 살핀다. 나를 한바탕 신나게 휩쓸고 간 파도가 남긴 잔물결을 나의 손에 올렸다가 내려보면서.
실제 체감했던 것보다 짧은 기간 동안 혼란스러운 일이 많았다. 휘몰아칠 때는 모르다가 매번 파도가 치는 순간은 찰나라는 사실을 뒤돌아서야 깨닫고 새삼 놀란다. 그 혼란 속에서 웬만한 일에는 중심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꽤 크게, 그것도 자주 흔들렸다. 파도를 타는 방법을 나름 터득했다고 해도 매번 밀려드는 파도는 다른 모양과 힘을 가지고 다양한 방향을 향했고, 바람결을 읽었다고 해도 그 바람에 따라 내디딘 나의 발걸음이 어떤 반향을 이끌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새로운 혼란을 마주할 때마다 능청스럽게 노련함을 부릴 틈이 없었다. 그럴수록 민감하게 느끼고 중심을 다잡기를 반복했다. 단단한 심지가 된 흉터의 흔적들이 말려 들어가는 마음과 움츠러들며 좁아지려는 시야를 끈끈하게 붙잡았다. 그럴 때면 고개를 들어서 두 눈으로 하늘을 본다. 찬찬히 마음을 펼친다. 펼쳐지지 않고 웅크린 부분을 잡아 뭉친 실을 풀 듯 살살 달래 본다. 질문을 하고 답을 하기를 반복한다. 툭툭 털어내듯 말린 부분을 쓸어본다.
결국 나만 남는다. 덩그러니 나만 남는다. 그럴 때면 여느 얘기에 나오는 클리셰처럼 진부하게도 나를 쌓은 조각들 중에 보고 싶은 것들을 뒤적거리며 찾기 시작한다. 기억과 시간, 그 속에 유독 이럴 때면 한 번 더 꺼내보고 싶은 유난스러운 조각을, 차곡차곡 쌓기도 하고 나를 덮어내듯 숨 막히게 쏟아지던 순간을, 지금의 나를 만든 또 다른 나를 톺아본다. 마치 타임머신 캡슐에 쌓아 넣은 물건들을 도로 꺼내보듯이, 보물을 찾듯 하나씩 모아둔 조개껍데기로 가득한 여느 유리병을 흔들거리듯이, 어디서 이렇게 모았는지, 언제 이렇게 쌓였는지 모를 사진 뭉치를 뜯어보듯이 낡고 반질반질해진 생각을 가만히 머릿속에서 훑어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아끼는 물건에 손길이 타면 헤지는 것처럼 생각을 자주 타면 혹여나 기억이 닳는 건 아닐까 우스운 염려도 하면서.
반짝임을 본다. 어둠이 있어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어둠 덕에 눈이 부신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긴다. 한순간 날 집어삼킬 듯이 검은 입을 벌린 우물은 내 것이다. 두려움이 아닌 질문으로 암흑 같은 어둠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 입에 무엇을 넣어줄지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결정한다. 우물이 기다리는 것은 나의 몸뚱이가 아니다. 찰랑거리는 빛을 붓는다. 우물은 밝은 물을 쏟아 낸다. 암흑 같이 까만 우물과 물결이 만드는 빛, 그 위로 마주 보고 있는 내가 조각조각 떠다니며 반짝거린다. 거칠었던 기억을 수없이 만지작거리면서 어느새 반드럽게 만든 나를 본다. 작은 나뭇가지로도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내던 나와, 그 많던 생채기를 모두 쥐고서 나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나를 기억한다. 그러다 보면 새삼 내가 이토록 다행스럽고 대견하다는 생각에 다시금 맑게 선명해진다. 찬란한 것은 유치해서 웃음이 나고, 빛나는 것은 눈이 부셔서 인상이 써진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파도가 날 휩쓸지, 하늘에 닿을 듯 치솟는 언덕을 얼마나 많이 넘어야 할지 한 톨처럼 작은 내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세상은 얼마나 요지경이고, 또 얼마나 흥미로울지 나의 상상력이 조금 부족한 탓을 해본다. 두렵고 즐겁다. '어떻게 하지'와 '어쩌라고'의 회전문을 돈다. '왜 그래'와 '왜 저래'로 저글링을 한다. 김연자의 '아모르파티'와 레드벨벳의 'Happiness'를 죽을 때까지 들으려고 한다.
그렇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간절히 죽고 싶었던 것만큼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다. 죽지 않는 이유는 별거 없다. 아직 고전도 다 읽지 못했는데, 신작들도 쏟아지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그것만 있으랴, 아직 보지 못한 연극과 뮤지컬도 너무 많다! 대극장 단골 극도 다 못봤으니 다음에 시즌 돌아오면 봐야 한다. 한번만 보면 다행인데 또 취향에 꽂히면 열심히 회전문을 돌아야 해서 시간이 바듯하다. 페어에 따라 봐야 하고, 라이선스 초연 말고도 창작 초연도 봐야 하고, 10주년이면 10주년이라서 20주년이면 20주년이라서 봐야 한다. 책을 연극화, 뮤지컬화하면 그것도 비교하면서 봐줘야 제맛이란 말이다.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해도 시간이 빈틈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는 잘 살아갈 계획이다. 죽는 건 나중에 생각을 찬찬히 해볼 텐데, 아참, 덕후의 시간은 2달이 더 빠르다는 건 알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