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거리를 둔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더욱 철저하게 거리를 두려고 한다. 단지 내가 어찌 고통에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저 고통을 마주 보고 감내하기까지, 속에서 굴리고 굴려서 소리로 빗어서 비로소 입 밖으로 뱉어낼 때까지, 그러면서 덤덤히 숨을 몰아쉴 수 있을 때까지, 도리어 자신의 고통을 나누고 싶어 마주 앉은 사람이 안쓰러워서 한숨 대신 미소로 갈피를 꽂을 때까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싶어서.
내가 뭘 안다고, 또 당신은 뭘 안다고.
아무리 사실만 본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주관성일 테니까. 우린 모두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고, 모르고 있는 것을 모를 때도 있다. 그렇게 무지하게 누군가의 시선대로 매만져서 조각내고 입맛대로 제조해서 편집한 일부가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을 그대로 믿어버리기도 한다. 이토록 순진하고 편협하다. 비슷한 고통을 어렴풋이 알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고통에 대한 전부가 아닌 것처럼. 완전한 이해와 헤아림의 결과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누구나 개별적일 테니까.
나름 노력해 본다고 고통이란 바다에 머리끝까지 완전히 입수하곤 했다. 그러면 그 속의 빛깔이 보았고 촉감이 느꼈다. 물론 주관성이라는 수경을 쓰고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지만. 그게 맞는 거라고 배웠다. 인간이라면 해야 하는 상도리라고, 올바른 정답이라고 들었으니까. 단순 암기하듯 다른 사람이 읊는 그대로를 외웠다. 나의 온전한 생각과 상대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민망할 정도로 얕았고 찰박거리는 소리는 가벼웠다.
한가로운 위로는 더 짙은 상처를 남겼고, 섣부른 판단은 편협한 폄하를 남겼다. 의미 없는 끄덕임은 한쪽으로 기운 저울에 무게를 더했다. 미지근한 안타까움, 피부에만 띄어놓는 표정, 가벼운 말소리, 그 속에 모래알 속 진주처럼 반짝거리며 언뜻언뜻 보이는 본능적인 안도감이 보였다. 차오르듯 새어 나오는 은근한 우월감과 본인만의 해석을 여기저기 보기 좋게 붙여놓는 모습이 스쳤다. 그러다 어디선가 ‘아니, 글쎄’라는 서두로 사람들의 이목을 잠깐 모을 간식거리가 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틀렸다고 쐐기를 박고 싶은 게 아니다. 잘못된 거라고 질타 따위를 하고 싶은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저것들에 간혹 더 큰 상처를 받곤 했다. 그렇게 고통 옆에 다른 모양으로 새로운 상처가 생기면 혼자 또다시 그걸 치유하는 데에 에너지를 더 쓰곤 했다. 상처에 약을 바르다가 당연히 옆에 있는 고통을 건드렸고, 그러면 겨우 잠재운 고통이 번쩍 눈을 뜨고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놀란 나를 빤히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외운 대본에 질문이 생겼다. 대본을 소화하는 방법이 이게 유일한 게 아닐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완전한 입수는 없던 것이다. 그 바다에 헤엄을 치는 것조차 상상 이상의 마음을 써야 한다. 얼마큼 써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모아둔 마음을 보다가 생각보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나의 무릎 언저리에서 맴돈다. 헤엄은 칠 수는 있을까. 사실 이해를 완전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오만이었던 게 아닐까.
타인이 가진 고통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슷해 보이는 고통이라도, 아주 같아 보이는 우물이라도 각자의 우물에 박힌 웅덩이는 다를 테니까. 어떤 웅덩이는 보이고, 어떤 웅덩이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웅덩이는 금방 메꿔지는데 어떤 웅덩이는 죽어도 안 메꿔진다. 깊은 웅덩이에 작은 웅덩이가 쉽게 생긴다. 작은 웅덩이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무너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어떤 웅덩이든 잘 메꾸지만 누군가는 아주 작은 웅덩이도 금방 메꾸지 못하고 한참을 방랑한다. 손으로 덮어놓고 아무것도 없는 척하며 방황하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모든 게 주관적이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섬찟했다.
엄마의 속은 썩어있었다. 뱉는 것보다 삼키는 것이 더 편한 당신은 수없이 삼키기만 해서 속이 썩었다. 입에서 수없이 피어나는 양귀비를 뱉어내는 대신 혼자 꼭꼭 씹어서 입안이 헐었고 삼키면서 식도가, 위와 창자가 문드러지다가 썩었다. 셀 수 없는 삼킴 중에 한 번의 뱉음을 나에게 하곤 했다. 대부분 이미 힘이 빠져 툭툭 떨어지는 투덜거림이었다. 그 한 번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 툭툭 떨어지는 투덜거림은 귓가를 할퀴며 뾰족한 조각이 되어 박혔고, 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그 당김에 못 이긴 나는 질척하게 늘어지다 엄마의 바다에 빠졌다. 그러면 숨이 막혔다. 뿌연 바닷속에 비치는 색깔은 눈을 뜨지 못하게 했고, 심장을 저리게 만드는 통증은 숨 쉬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파닥거리면서 바다에서 빠져나오면 신경질이 났다. 찐득한 안타까움이 자꾸 들러붙는 게 불편해서 마음이 답답했다. 물먹은 옷은 어깨를 뻐근하게 했다. 온몸에 맺힌 물방울을 엄마한테 도로 모조리 털어내면, 결국 남은 것은 털어 낼 수도 없고 털어지지도 않는 감각뿐이었다. 함부로 불쌍했고 안타까웠다. 그러면 나에게서 엄마는 작아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의 시선으로 엄마를 함부로 재단했다. 엄마의 바다는 이런 것이라며, 그 이유는 이런 것이라며, 함부로 판단하며 불쌍했고 안타까워했다. 주관성이라는 수경을 쓰고 내가 입고 있던 옷을 입은 채로 바다에 빠진 것을 망각한 것이다. 엄마는 나를 하나도 모른다고 했으면서, 나의 고통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얘기했으면서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생각하고 판단했다. 엄마의 고통을 내 틀에 맞춰 재단했다. 나의 생각의 절차에 맞게 편집하고 살을 붙였다. 그게 마치 번듯한 자식의 도리를 하는 것처럼 굴면서 말이다. 오만하고 가볍다.
동네 꼬마였을 엄마와 소녀였을 엄마를, 누군가의 친구였을 엄마와 연인이었을 엄마를 상상해 본다. 동생들을 챙기느라 공부할 시간도 없던 엄마를, 몇 안 되는 짐을 꾸려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 엄마를 그려본다. 작은 공장에 들어앉아 동료들과 일을 하는 엄마 곁에 앉아보고,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언젠가의 나를 그렸을 엄마를 바라본다. 어쩌면 좋을까, 한참을 모른다. 나는 엄마를 한참을 모른다.
[소설] 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고통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어디에 있을까. 가능은 한 것일까. 많은 의문이 생긴다. 정답이 아닌 대답을 듣고 싶다. 이 소설이 그 대답을 해주는 듯하다. 고통에 대한 이해를 위해 기꺼이 그 속에서 한가득 숨을 들이마신 이 소설이 나에게 대답해 주는 소리를 듣는다.
고통을 이해하는 건 단지 얄팍한 안타까움만이 아니라고. 한가로운 위로도, 섣부른 판단도 없고, 의미 없는 끄덕임이 없으니 저울에 더할 무게도 없다고. 그러니 본능적인 안도감이나 은근한 우월감, 마음대로 잘라낸 천 조각도 없는 것이다. 당연히 잠깐의 이목을 끌기 위해 희생할 간식거리도 있을 리가 없다. 진정으로 남는 것은 털어낼 수도 없고 털어지지도 않는 눈물이었다. 동시에 누가 읊어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누가 알려줘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모든 세포로 깨닫는 오감뿐이었다.
젤리를 까먹듯 손쉽게 타인의 우물을 안타까워하며 동정하고 싶지 않다. 기특해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다. 본인만이 알고 있을 고통을 길거리에 있는 주인 없는 인형에 손을 대듯 쉽게 건드리고 싶지 않다. 단지 호기심을 해결하고 싶은 거면서 아닌 척하면서 이해하는 흉내를 내고 싶지 않다. 그 우물에 말꼬리를 붙이고 싶지도 않다. 고통에 적당한 거리를 둔다. 그러고 나서 그저 나는 나의 우물을 보여줄 뿐이다. 메꾼 웅덩이 옆에 새로운 웅덩이, 잠재운 고통 옆에 새로운 상처, 질척거리는 바닷물과 가볍게 스치는 바닷물, 차분한 밤과 서늘한 낮, 찬란한 윤슬과 눈부신 어둠. 밀려드는 파도와 물러가는 거품.
나의 우물을 바라보는 당신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의 우물에 비치는 당신의 우물은 어떤 깊이와 모양과 빛깔을 가지고 있을까, 혹여나 두꺼운 나무판자 따위로 우물을 막고 서서 한참을 방황하고 있진 않을까. 짧은 오지랖을 그만두고 담백하게 나의 고백을 읊는다.
나의 것이 당신의 것이 될 수 없듯, 당신의 것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무너지는 순간도, 방황하는 순간도, 깨달음을 얻는 순간도, 성장하는 순간도, 그러나 흉터는 완벽히 지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순간 모두 달라서 서로가 흥미로운 것이 아닐까. 많은 삐그덕거림에도 여전히 손을 내미는 이유가 아닐까.
그냥 나는 이렇다고.
굉장히 감각적인 소설이에요. 감각적이라는 게 막 센스 있다, 세련됐다 이런 뉘앙스의 감각적임이 아니고, 오감,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감각에 대한 그런 감각적임을 말하는 거예요. 살갗에 그 당시의 광주의 공기가 스치는 촉각과 미각, 눈길 따라 또렷하게 그려지는 그 당시의 모습에 대한 시각과 후각, 인물의 말을 따라 또박또박 마음이 따라 걷기에 오는 저릿함에 대한 청각. 현생에서 쉬는 시간에 혼자 읽다가 진짜 펑펑 울 뻔했습니다. 정말 잘 쓴다는 생각도 같이 들어서, 멋있는 작가의 글을 읽었다는 행복이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