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검은 개가 온다, 송시우
책은 그 사람의 시간을 나타낸다는, 상투적인 저 말을 나도 알게 모르게 따르는 건지, 이 책을 읽을 당시, 공교롭게도 새로 발령 난 회사 옆자리 직원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책을 만나고 그 직원의 우울을 봤는지, 그 직원의 우울을 보고 이 책을 만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분명한 건 나는 항상 우울과 함께였다는 것이었다. 그런 우울을 생각하는 시간이 꽤나 즐겁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진실은 그 직원만이 알 테지만, 단지 옆에서 본 것이라면 그 직원은 '혼자'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속으로 수없이 끙끙거리며, 아마 혀뿌리까지 올라온 청산가리 따위를 혼자 넘겨 삼키기에 바빴을 것이다. 다른 상대 직원들은 일방적이었고, 그 직원은 어떻게든 감당하려고 하거나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범위에서 잘라내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일방적임에 떠밀린 그 직원은 그저 머리를 집어 뜯다가 그 공간을 도망치듯 벗어날 뿐이었다. 이 사실조차 상대 직원들은 모른다는 것이 섬찟한 현실이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해 보이던 그 직원은 결국 잠시의 숨통을 내는 방편으로 긴 병가를 냈고, 그 병가의 증빙서류인 진단서에는 '원인불명의 우울증'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직원이 떠난 자리엔 금세 다른 직원들의 목소리로 차기 시작했다. 그 텅 빈자리에 숨 막히는 서류 뭉치들이 턱턱 올라가듯 여러 목소리는 쌓여 올라가다 다시금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니, 여기가 그렇게 힘든 곳도 아닌데, 다른 직원들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닌데, 이것도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 하나가 쌓이고, '돌아올까? 글쎄, 저게 그렇게 쉽게 낫는 게 아니니까 바로 돌아오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뭐, 워낙 성격이 또.' 또 쌓이고, '내가 다른 곳도 다녀봤는데, 다 똑같아. 그나마 여기가 괜찮은 편이야. 근데 저렇게 힘들어하고 그러니까, 참.' 그렇게 쌓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흩어져 사라졌다. 그 속에서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바로 옆 자리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유가 되기엔 충분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향해 가장 못된 놈이라고 해도 어쩔 방도가 없다. 바로 곁의 가족도, 아니 나조차 내 마음을 모르는데, 어찌 감히 나 따위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나의 입을 더욱 닫치게 만든 것은 그 빈자리를 향하는 안타까움이라는 소리, 그 미명 하에 숨겨진 다른 직원들의 동정하는 듯하면서도 인색한 태도였다. 그 모습들이 여전히 머리에 선명히 맴도는 것은 평소 그들이 나쁜 사람이 결코 아니었고, 그 직원과 나쁜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쁜 사람과 나쁜 관계였다면, 이리도 내 생각에 오래 머물렀을까. 우울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조차 배불러서 하는 소리라고 하는 것 같은 그 소리와 태도가 그 직원의 빈자리에 턱턱 날아 쌓일 때마다, 그 결에 따라 일렁이는 차가운 바람이 나의 살갗에 닿았다. 그 바람은 나에게 닿아 결코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들을 일었다.
무엇이 저들의 눈물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을까. 무엇이 저들 또한 흘렸을지 모르는 눈물을 단지 배부른 소리로 만든 것일까. 무엇이 저들의 눈물조차 저울질하게 만들었을까. 우울은 진짜 죄인 걸까. 그렇다면 죄인은 누구인가.
우울이 올 때마다 두려웠다. 처음에는 우울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다음은 두려움이었다. 우울이 오는 기척이라도 느껴지면 벌써부터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하며 지친 나를 더 높은 기분으로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그런다고 왔던 놈이 다신 안 오는 것도 아니었고, 무리하게 끌어올린 기분은 전보다 더 아래로 향하기 마련이었다. 그 꼬라지를 보고 있노라면, 나랑 우울은 그냥 환장의 커플이었다. 그 꼬라지를 반복하다가 지칠 대로 지쳐서 자포자기 상태로 그래, 너 생긴 거나 어떻게 생겼나 구경이라도 좀 해보자며 우울을 대면하자 우울은 나의 얼굴이었고, 또 다른 나의 한 부분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도리어 웃음이 났다. 그렇게 우울은 어떤 낯섦도 없이 익숙하게 나에게 살갗을 맞대고 대화를 걸어왔다.
우울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덮치는 비겁한 놈이 아니다. 오히려 우울은 나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고, 안쓰러워하며 계속 자신을 봐주길 바라며 수없이 발을 구르고 손을 내 젓는다. 그런 우울을 외면하고 무시하며 결코 아니라며 인정하지 않는 비겁한 놈은 나인 것이다. 우울은 그런 무시와 외면, 왜곡 속에서 점점 팽창하는 자신의 몸집을 보며 고통으로 울부짖는다. 이게 아닌데, 이건 내가 바랐던 게 아닌데, 울먹이며.
우울은 끔찍한 모습을 한 무시무시한 도깨비나 음침하게 나의 그림자를 밟아 쫓아와 은밀하게 몸집을 불리며 입맛을 다시는 유령이 아니다. 나의 살갗과 숨을 나누는 동반자이다. 누구보다 나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며, 오로지 나에게만 예민하게 모든 오감을 곤두세우며 지켜보는 검은 개다. 그 순간 알았다. 우린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죽음과 함께이듯, 내가 감각하는 한, 우울도 함께이겠구나.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웃어봤다면, 한 번이라도 산뜻한 가벼움을 온몸으로 느껴봤다면, 혹은 그런 진심을 진심으로 봤다면, 그렇다. 모두 우울과 함께일 것이다. 우울의 모습을 직면하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기척이라도 느꼈을 것이다. 혹시 우울을 안다는 것 자체부터 슬픔이라고 생각하는가. 글쎄, 정말 글쎄다. 우울을 모르는 것이 진정한 즐거움일까. 낮과 밝음만이 동경의 대상, 농롱함의 절정이 아니다. 그것만이 소위 정답이나 올바른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밤과 새벽을, 또는 동틀 그 찰나를 밝은 낮보다 기다리며 설렐 지 모른다. 그들은 낮의 찬란함뿐만이 아니라 저녁의 여유로움을, 밤의 고즈넉함을, 동틀 무렵의 시원하고 아쉬운 기지개를 아는 것이다.
그니까, 우울을 아는 당신은 참 깊고 넓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왕 살아 숨 쉬는 거 지상과 하늘에서는 코로 쉬고, 끝없이 추락하는 바다에서는 아가미로 쉬면 좋지 않나.
세상은 온점으로 가득 찬 커다란 그래프판과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는 무지 커다란 그런 그래프판. 그 면은 가정이고, 집단이고, 국가이고, 사회이며, 세상이다. 오른쪽에 찍힌 점이 있듯, 왼쪽에 찍힌 점이 있다. 그 점 중에 없어야 할, 보잘것없어 사라져도 모를, 아니, 차라리 사라지는 게 더 나을 점은 어디에도 없다. 더 옳은 점도, 틀린 점도 없다. 그 점이 사라지는 순간, 선은 무너질 것이고, 선이 무너지면 면은 옅어지다가 흔들릴 것이고 곧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게 순서의 이치이다. 그러나 참 모순적이게도 면은 좀 더 이상적으로 생각하며 원하는 구역이 있고, 선이 있고, 점이 있다. 그 구역은 더 옳은 구역이 되고, 그 점은 더 바람직한 점이 된다.
그 면에는 내성적인 점, 수줍음을 잘 타는 점, 뱉기보다 삼키는 게 맘이 편한 점, 남을 향해 미소를 짓는 것이 어색한 점이, 이 보다 더 다양한 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반대편에는 그렇지 않은, 그래, 그 대단하신 세상님이 좋아하는 구역이 있고, 온점들이 있다. 세상은 그것을 마치 무조건 맞혀야 하는 정답처럼 들이댄다. 아휴, 저리 좀 치워, 아주 그냥 질린다, 질려, 손을 내 젓지만 곧이어, 그래서, 뭔데, 뭐가 정답인데, 뭐 좀 봐보자, 하며 조금이라도 자신도 해당될까 기대하며 열심히 틈을 비집는다. 아니라고 하지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더 많은 것을 잡기 위해,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또는 더 이상 가진 것도 없어서 그저 살기 위해, 그 점으로 몰린다. 결국 정답과 오답이 정해진다.
한국형의 싱거운 추리소설이 아닐까라는 과거의 나를 비웃는 듯, 이 소설은 추리와 쟁점, 두 마리의 토끼를 한 손으로 맞잡고도 남은 한 손은 나의 마음을 잡았다. 추리 진행을 위해 우울 소재를 사용했다기보다는 우울 쟁점을 다루기 위해 추리의 서술 방식을 택한 소설이라고 느꼈다. 어떤 관점으로 보면 호불호가 많이 나뉠 수도 있다. 같은 쟁점의 다른 관점을 가진 인물들이 하는 대화는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며, 기존 쟁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정보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애써 외면한 문제는 눈앞에 턱 하니 들이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치밀하다. 두 개의 사건이 하나의 사건으로 점차 좁혀 들어가는 추리 진행 관점에서도, 쟁점 제시 관점에도. 착착 잘 짜인 니트처럼, 아기돼지 삼 형제 막내 돼지의 벽돌집처럼 소위 빌드업을 잘했다.
우울증 환자의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치밀한 추리 서사 속에서, 중심 테마인 우울과 그와 얽혀있는 우리 사회, 그리고 우울증 진료와 약에 대한 정보와 편견에 대한 이야기부터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 현상이나, 우울증 환자의 우발적 범죄와 범죄자의 불순한 우울증 흉내 그 사이의 딜레마에 대한 것까지 이야기를 시도한다. 많은 쟁점을 다루는 것은 죽이냐 밥이냐 소설로 갈 수 있는 최적의 레시피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독자의 머리에 커다란 벤다이어그램을 펼쳐서 결코 소설과 함께 독자까지 길을 잃지 않게 한다. 그 길을 같이 걷는 동안, 우리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피해 오고, 답을 하지 못해 불만과 불평으로 입을 오므리고선 머리 아프다며 미루던 많은 생각들과 마주하고, 많은 질문에 더 많은 대답을 시도한다. 차가운 바람에 얕게 고개를 일으킨 나의 의문들은 이 소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아예 자리를 잡아 앉고선 오랜 대화를 했고, 그 대화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애초에 끝낼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쉬이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