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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윤 Dec 10. 2021

사랑의 정의

[에세이] 연애하지 않을 권리, 엘리

  당신한테 묻고 싶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의가 무엇인가. 사랑이 무엇인가.


  대개 사람들은 사랑의 정의를 너무 좁은 영역에 한정시킨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이. 당신의 생각이 많이 고였다면, 혹은 스스로 멋있거나 훌륭하진 않지만 꽤 괜찮은 인생 선배라고 생각하면서 조언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혹시 저 질문의 사랑의 정의를 '이성을 향한 섹슈얼한 감각을 전제로 한 감정과 애정, 또는 연애. 혹은 결혼을 전제로 한 모든 일련의 과정'이라고만 대답을 했는가. 아니면 비슷한 결로 대답을 했는가. 이러한 한정된 개념 정의가 사랑이라는 잠재력을 너무 한정시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추상적이다. 그 말은 사랑이란 모양도, 향기도, 촉감도, 어떠한 감각도 확실히 정해진 것이 없다. 또한 정의하는 영역도, 범위도, 어떠한 형태 또한 정확한 기준표가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은 한정적이고 제한적인 것이 아닌,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사회적, 암묵적, 문화적 기준에 따라 형성하고 재단하고 제한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단연코 무한적이고 무형적인 것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 한국 사회는, 아니 적어도 내가 겪은 수많은 경험과 주변인들은 사랑이라는 정의를 '이성을 향한 섹슈얼한 감각을 전제한 감정과 애정, 혹은 결혼을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 한정하여 생각할까. 이 정의가 너무도 당연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도리어 '특이'하게 생각하는 양상에 대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존중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고에 대해, 더 나아가 에헤이, 네가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 혹은 '진짜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아서 따위의 환장의 짝꿍 멘트를 내뱉으며 어찌 그리도 타인의 상황을 잘 아시는지 자신의 시야로 상대를 재단하여 함부로 미루어 짐작하는 태도에 대해 항상 의문이 일었다. 물론 나는 확신한다. 여전히 이러한 반응들은 없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뭐, 없어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저러한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말과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에, 감히 내가 뭐라고 할 권리는 없으니까. 뭐 별 감흥도 없기도 하고, 잠깐, 근데 저건 좀 선 넘었지. 그것도 아주 심하게.


  나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인간인 줄 알았다. 소위 얘기하는 '그런 진정한 사랑'이 뭔지 몰랐다. 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도, 감각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는 그런 냉혈 하고도 쓸쓸하고도 슬픈 인간, 그런 인간인 줄 알았다. 이러한 생각과 감각은 주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다들 서로의 애인을 찾아 구애에 힘을 주었고, 그것은 청춘의 산물이자 젊음의 혜택, 열정의 증거이자 매력에 대한 보증서와 같은 것이기도 했으니까. 페로몬을 서로 열렬히 뿜어댔고, 그러다 그것의 결정체와 같은 결과로 애인이 생기면 그들은 초등학교 때 받은 상장을 내보이듯 떵떵 소리치며 들이대기도 했고, 취업 후 받은 회사 명찰을 은근히 밀어 보이듯 행동하기도 하며, 조금씩 다른 다양한 양상들을 보이긴 했지만 하나같이 같은 점은 마치 자신은 사회의 패배자가 아니라는 듯이, 뭔가 문제가 없는 사람임을 증명하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보는 우리는 그래, 인간이라면 암, 그렇게 해야지 따위의 태도로 받아들이곤 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러지 않는 인간들은 당연히 은밀하고도 음침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한 것은 정해진 절차의 수순이었다. 더하여 원치도 않은 사람을 지들 맘대로 엮는 건 보너스. 좀만 친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며 개슴츠레한 눈빛으로 흘기는 것은 서비스.

  쏟아지는 미디어와 매체의 '낭만적 사랑', 책으로 읽고 영화로도 봤던 공주님들의 '오래오래 행복하게'식의 사랑이야기, 주변의 저러한 환경들까지 환장의 레시피로 버무려진 사회 속에서, 나는 '별종'과 같았다. 나에 대해 알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쏟는 것은 아직 미숙했고, 나보다 주변을 신경 쓰기 바빴던 어린 그때의 나는 저 놈의 은밀한 의심의 눈초리가 참으로 눈치가 보였다. 그러면 등 떠밀리듯 어설프게 그들의 형태를 따라서 해보곤 했지만, 모르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남은 것은 들어왔던 소위 '그런 진정한 사랑'이란 것의 싱거운 맛에 대한 실망감과 떨떠름한 미소뿐이었다. 알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나의 착각과 망상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던 기억의 찌꺼기에 불과했다. 나는 정말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일까. 이런 내가 사이코패스와 같은 부류인 줄 알았다. 그런 부류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른다며, 느끼지도 못해서 주지도 받지도 못하잖아. 그런 건가. 나 사이코패스야? 아니면, 소시오패스?


  우물 안에서 하늘은 한 바닥도 안 되는 한 줌의 동그란 솜뭉치다. 그것이 하늘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하늘이라고 하기엔 우물 안에 앉아있는 개구리는 너무 어리석다. 그리고 그 개구리가 나였던 것이다. 그것만이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했다. 갈구하고 갈망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인 줄 알았다. 그러기엔 세상에 하늘은 너무 넓다. 나의 머리와, 어깨와, 무릎과, 발까지 나의 모든 것을 모두 덮고도, 나의 양팔의 끝을 둥글게 말아 넘어가고, 나의 시야의 양 끝을 넘실넘실 파도를 치며 밀려든다. 한 줌의 숨 뭉치가 아닌, 바다와 같았고, 호수와 같았고, 숲 속의 들판과 같았고, 실컷 뛰노는 놀이터와 같았으며, 소리 내어 울분을 토해내도 모두 받아주는 너른 얼굴과 같았다.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성을 향한 섹슈얼한 감각을 전제로 한 감정과 애정, 또는 연애. 혹은 결혼을 전제로 한 모든 일련의 과정’이 맞을 수도 있다. 아주 작은 조각의 형태로 그것은 맞다. 무한하고 무형한 사랑에는 무수한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나에게 사랑은 부모를 향하는 눈물과 경애심이고, 형제를 보면 느껴지는 애틋함과 편안함이며, 마음이 많이 기우는 친구를 향한 우정이 되기도 하고, 좋아하는 교수나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되기도 한다. 작은 화면으로, 짧은 글로 소통하는 어느 누군가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진심 어린 걱정이 되기도 하며, 길에서 찰나의 순간으로 슬쩍 스쳐 지나가는 고양이와 강아지를 보고 몸을 비틀어대는 귀여워하는 감정이 되기도 한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또한 사랑을 주고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미 열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 널린 것이 사랑이었고, 사랑은 나의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며, 나의 감정은 사랑에 충만했고 성숙했다. 그것들은 나의 움직임에 따라 매 순간 새로운 빛깔을 반사했고 결코 누워서 식은 죽 먹기 식의 결과가 되지 않았다. 항상 새롭고 때론 어려웠다. 그것들이 공기처럼, 습기처럼, 작은 이슬방울처럼, 내리쬐는 햇살처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집의 향기처럼 계속해서 나의 살갗과 숨결을 따라 스미고 있었고, 그렇게 적시고 적셔서 심장의 뿌리까지 부족함 없이, 빈틈없이 나를 충만하게 촉촉하게 만들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적셔진 심장의 뿌리에는 완벽한, 완전한 사랑의 형태에 가장 가깝고 감히 단언하는 사랑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나'에 대한 사랑이다. 여전히 나는 나를 모른다. 여전히 궁금하고 질문하며 끝이 없을 대화를 한다. 돈을 쓰고, 시간을 들이며, 에너지를 쏟는다. 새로운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혼란스러워하기도 하며, 폭소를 터트리기도 하고, 대견해하기도 한다. 고쳤으면 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며, 좋아하고 심장이 뛰는 것을 찾으려고 모험을 하고, 그렇게 하나하나 찾은 보석 같은 조각에 신나 하기도 한다. 과거를 질책하고 반성하기도 하며, 미래를 향해 그 누구보다 응원하고 지지한다. 어른스러운 어르신이 되었다가, 천진한 아이가 되었다가, 곧 생을 마감하는 노인이 되었다가, 눈이 시리도록 푸른 청년이 되었다가, 그렇게 오롯이 나체의 모습으로 마주한다. 여전히 궁금하고 질문을 한다. 끝없이 새롭고 끝없이 새로울 것이다. 그래서 질릴 수가 없다.


  인생은 비빔밥과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밥이라는 인생에 각자의 입맛대로 원하고 좋아하는 반찬을 넣는다. 셀 수 없는 반찬에서 누군가는 시금치를 빼고 콩나물을 무조건 넣어야 맛있다며 한 움큼 집어넣을 테지만, 누군가는 콩나물을 넣지 않고 시금치를 넣을 수 있다. 매운 것을 좋아하고 잘 먹는 사람은 고추장에 비빌 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간장을 넣고 비빌 수 있다.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비빔밥이 아니라며, 네가 진짜 비빔밥을 모른다며 질책하고 억지로 먹이는 행위가 진정 정답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결코 아니다. 진짜 비빔밥이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냥 당신의 입맛대로 섞어 비빈 비빔밥을 진짜 비빔밥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비빔밥이 모두의 취향에 알맞을 거라고 어찌 섣부르게 단언할 수 있는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턱 끝을 올려 들 것이, 은밀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 원치 않는 사람을 억지로 엮을 것이 결코 아니다.


  당신은 사랑의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당신의 사랑의 정의가 무엇이든 존중할 준비가 되어있다.

[에세이] 연애하지 않을 권리, 엘리, 카시오페아

  사랑에 대해, 연애에 대해, 그냥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작은 의문이 들고 작은 고민이라도 사색했던 사람이라면 읽어보길 권하는 잘 쓰인 책이다. 아무래도 시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드립이랑 말재간들이 좀 있어서, 그 당시엔 세련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지금 보면 오글거리는 시쳇말이 된 것도 있긴 하다. 책이 말하는 것은 큰 맥락으론 사랑이지만, 단지 사랑만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는다. 적대적인 마음이 들지 않으면서 이마를 치게 만드는 유쾌한, 적절히 치고 빠지는 작가의 입담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그 이상의 사유를 유도하는 날카로운 얘기가 쏟아진다.

  어쩌면 작가의 생각이 많이 도드라지다 보니 비판적인 시야를 가지고 나의 대화를 꾸준히 하면서 읽는 것이 이 책의 맛을 더 감칠 나게 해 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쉽게 즐기면서 읽다가 꿀잠 자면 될 것 같은 도입부에 깜빡 속았다. 읽을수록 고개는 공감에 힘입어 횟수를 더하여 끄덕였고, 계속해서 답을 찾고 싶은 의문과 질문들이 솟아났다. 발 뻗고 꿀잠 잘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꼬리를 문다. 단점이라면, 뭐 꿀잠 대신 질문에 대답을 찾느라 바빴다는 것? 이 여정이 당신만의 사랑의 정의를 찾게 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라서 다시 한번 들쳐봤어요. 놓쳤던 부분도 다시 보이고, 그때 읽었던 감각과는 또 다르게 읽히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역시 책은 한번 읽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렬해집니다. 오늘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한번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거 은근히 재밌더라고요. 책은 항상 똑같지만, 그 책을 읽는 그때의 나는 항상 다르기에 말이죠. 읽으면서 공감된 부분도 많았고, 의아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금 생각하는 부분도 있고, 썩 공감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재밌다고 생각한 책이에요. 작가의 얘기를 찬찬히 읽으면서 같이 대화를 한다는 마음으로 나의 생각도 정리하고 질문과 의문에 나름대로의 대답을 찾아가면서 읽으면 더욱 맛깔난 책이랍니다.

  이번 글은 생각을 자주 했던 것이에요. 매번 사랑, 연애, 애인, 결혼 등에 특히 고뇌를 많이 했어요. 주변의 영향이 꽤 있었죠. 그러면서 타인의 것이 아닌, 나만의 사랑, 연애, 애인, 결혼 등에 대해 나만의 대답을 찾으려 노력했고, 결국 나름대로의 답을 찾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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