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Temple 템플, 실존인물 모티브
여느 때와 같았다. 극을 보고 맛있는 저녁으로 기분 좋게 배까지 채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쾌적하다 느껴질 정도로 지하철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어서 많지 않은 빈자리가 듬성듬성 있었다.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으며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규칙적인 전철 소리가 엉성하게 비어있는 공간을 어수선하면서도 잔잔하게 채웠다. 전철은 성실하게 역에 천천히 멈췄다가 다시 큰소리를 내며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낮게 깔리는 사람들의 자근거리는 수다 소리와 가볍고 예리한 기계 소리가 한 곳에 뭉실뭉실 떠 있다가 열리고 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따라 소나기처럼 커다란 바람을 끌며 오르고 내렸다.
그러다 비어있던 임산부 배려석에 누군가가 앉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를 누군가를 위해 남겨놓는 자리였다. 순간을 조심해야 할 누군가를, 난생처음 겪는 몸의 변화를 온전히 혼자 감당하고 있을 누군가를, 무거워진 배와 부어버린 발에 잠깐 숨을 고르고 싶을 누군가를, 온전히 본인만 바라보는 존재를 지켜야 할 누군가를 위해서 내 마음을 대신해서 남겨놓는 자리였다. 앉은 누군가는 남성이었다. 그리고 외국인이었다.
엥?
모든 건 찰나였다. 생각은 생각보다 빨랐고, 판단은 그보다 더 순식간이었으며, 그 속에 선입견까지 물들이는 건 식은 죽 먹기 정도의 일이었다. 동시에 남성의 동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남성에게 임산부 배려석 안내를 가리키고, 빨리 일어나라는 몸짓을 보여준 것과 그러자 어정쩡하게 엉덩이만 겨우 걸치고 앉아있던 남성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른 칸으로 넘어 걸어간 것까지 이 모든 게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짧은 순간,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불편하고도 보통의 나를 발견했다. 밀려오는 얕은 부끄러움에 멍하게 허공을 떠다니는 눈길을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겨우 집어 올 수 있었다.
외국인이었고, 그중에서도 동남아시아 쪽 출신 같아 보였다는 것과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도 아니면서 배려 없이 앉은 것에 그들의 기본 상식의 부족함과 인성의 뻔뻔함을 모두 연결 지어 낙인을 찍었다. 물론 정말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 동시에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확실성을 부여할 수 없다. 나의 입맛을 돋우는 대로 아무 곳이나 확실성을 부착하고 싶지 않았다. 매번 주의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에서 짧은 순간에 생각의 무게가 기울었다. 뻣뻣하게 굳은 관절이 편하다고 할 뻔했다.
외국인이니까 잘 모르겠지, 안다고 해도 ‘외국인’이라는 핑계를 대면 끝이니까. 그래, 외국인이란 항상 그러니까. 정말 무지하고 뻔뻔하다니까.
국가가 다르고 태어나 자란 곳이 다르니까 그들이 다른 것은 맞다. 달라서 모를 수 있다는 것도 맞다. 그렇다고 그 ‘다름’이 ‘틀림’이 될 수는 없다. 다르다는 것이 그 사람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무시하는 행위를 합당하게 만들 수 없다. 듣고 보고 느끼지도 않고 지레 판단하면서 혀를 찰 수 있는 권리 따위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말을 듣고 대화를 나누기 전에 앞서서 틀렸다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할 수 있는 자격 따위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다른 것이니까. 틀린 것이 아니니까. 확실성을 여기에 붙이려고 한다. 사람은 결코 틀린 존재일 수 없다.
어쩌면 하필 이 연극을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런 나를 발견한 것일까.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뿌연 부끄러움이 서서히 걷히자 '정말 기적이야!' 템플이 보였다. 템플이 자신만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의 문 앞에서 한참을 주춤하며 망설이던 그때, 첫걸음마를 내딛게 했던 말을 나에게 하는 듯했다. 편안했을 자신의 세계, 그 앞에 울렁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 불편하지만 새롭고 낯설지만 무한할 공간의 문 앞에 템플은 활짝 문을 열고 들어간다. 맞아, 템플. 정말 기적적인 일이네!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름을 틀림으로 정의하는 어리석음이 말이다. 아무래도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알지 못하니 이해하지를 못하고, 이해하지를 못하니 대화하지 못하고, 대화하지 못하니 더욱 알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 혹은 낯설고 새로운 ‘다름’을 꼭꼭 씹어서 소화하기에는 힘이 들거나 거슬리거나 귀찮아서 그저 ‘틀림’으로 씹지도 않고 빠르게 꿀꺽 넘겨서 치워버리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진작에 자리를 잡은 암묵적인 세계와 그와는 꽤나 다른 모습의 흐름이 말이다. 그 흐름은 새롭고 낯설며 불편하고 압도적이다. 어떤 속도와 움직임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굳건하고 지루한 세계를 뒤흔드는 거친 파동을 가져오는 것도 항상 그랬다. 그 파동에 흔들리고 부서진다. 무너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 속에서 공간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넓어지기도 한다. 먼저 있던 것과 뭉치고 엉키고, 섞이고 어우러져 새로운 모양을 형성하기도 한다. 어떤 부분은 짙어지고 옅어진다. 뻔했던 게 흥미로워지고 재밌던 것이 지루해진다. 찰박거리는 소리는 깊어지고 굴곡은 나른해진다. 천박했던 것이 울창해진다. 포근하게 고인 공기가 회전하며 개운해진다.
그러면 어수선하고 번거롭다. 복작거리다가 고요해진다. 치열하고 거슬리는 고통과 차분하고 넉넉한 공허가 반복된다. 피곤하고 귀찮기도 하니 외면하고 회피하기도 한다. 차라리 가지고 있던 것을 꼭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왜곡하고 곡해하며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생각만이 정답이어야 하니 목소리가 커진다. 여러 설명이 붙어 말이 많아진다.
그게 정말 맞은 것일 수도 있다. 동시에 아닐 수도 있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쌓인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빅데이터의 값일 수도 있으며, 어떤 이익을 위한 의도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무의식적인 습관일 수도 있으며 이미 많이 뻣뻣해진 관절이 더 고통스러워 어쩔 수 없는 걸 수도 있다. 그렇게 무지에서 편견이 생긴다. 무지에서 유일한 정답이 생긴다. ‘다름’은 ‘틀림’이 된다.
자폐증이 엄마의 냉담한 태도로부터 발병한다는 그 시대의 무지함, 자폐증의 진짜 원인을 알고서도 귀를 막으며 비난하고, 유도 검사를 통해 잘못된 결과를 도출하여 모든 원인을 부모로 떠미는 의사들의 태도, 템플이 다른 사람과 달랐던 부분을 성도착증 환자의 증상으로 오해하며 더 이상의 이해도 하지 않고 책임지지도 않으려는 선생과 학생들, 애초에 템플의 ‘다름’을 알려주고 이해시켜 주는 어른이 있지도 않기에 다름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다름은 어느새 템플을 놀리기 위한 값싼 장난감 따위가 된다. 늘어가는 틀린 놀림과 따돌림 속에 템플은 칼록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아무도 깨닫지 못한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스스로 성장한다.
연극의 마지막 무렵, 템플은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나서야 모두가 자신처럼 세상을 그림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을 그림으로 인식하는 템플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자신과 다른 존재인 것이다. 여태 템플이 ‘다름’의 기준이었는데, 그들이 ‘다름’의 기준이 될 수도 있는 거다. 뻔한 기준이 바뀌는 새로운 순간이다.
누군가에게 같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것이 된다. 누군가에게 다른 것은 또 누군가에게는 같은 것이 된다. 자, 그러면 이제 다름을 틀림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이 연극이 문을 열고 나에게 남긴 발걸음이었다.
어쩌면, 맞아요. 참 부끄러운 이야기죠. 근데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에게요. 제가 재밌게 읽은 책<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속 좋아하는 문장이 생각나네요. '생활은 생각하지 않아도 유지되지만, 삶은 생각하지 않으면 망가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사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나의 삶을 망칠까 검이 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