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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횡설술설 Mar 27. 2022

변하지 않는 처음들

나를 살아있게도 죽어있게도 만드는


‘첫’ 경험은 누구에게나 곧잘 애틋함을 불러온다. 처음 학교 가던 날, 처음 자전거 탔던 날, 처음 머리 염색했던 날. 이런 처음의 순간들은 계절과 함께 오기도 하는데, 다른 계절의 처음은 그다지 뚜렷하지도 않거니와 매번 뒤죽박죽이기 마련이지만 봄이 오는 첫 순간만큼은 매년 쿵, 하고 다가와 나를 싱숭생숭 뒤흔든다. 겨울 칼바람이 훑고 지나간 공기 속에서 슬그머니 내 코끝을 톡톡 쳐 나도 모르게 킁킁거리게 되는 그때.


추운 날을 유독 좋아하지 않는 나라서 다른 계절이 찾아왔을 때보다 봄으로 바뀌는 이때가 유독 더 반가워, 매년 공기의 미세한 그 변화가 느껴질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개강한 날 아침 학교 가는 길에, 저녁밥을 먹고 식당 문을 막 나섰을 때 슬몃 슬몃 느껴지던 봄기운에 어찌나 설레든지. 다른 ‘첫’ 기억들은 퇴색되거나 변질되곤 하는 와중에 나를 변함없이 똑같은 ‘첫’ 느낌으로 싱숭생숭하게 만들 수 있다니. 너는 늘 변함없구나. 변함없이 또 이렇게 나를 찾아와 줬구나. 그래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지. 싱숭생숭.


봄이 되면 가수 박지윤의 <바래진 기억에>라는 노래가 늘 떠오른다. 대학 신입생 시절 등굣길이 멀어 버스를 두 번 지하철로 한 번 갈아타고 갔어야 했는데 그때, 두 번째로 갈아 탄 144번 버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노래를 듣던 당시의 감정도, 장면도, 봄 내음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독 선명하게 새겨진 장면들' 중 하나인 이 씬은 매년 gif 형태로 날 찾아와 봄이 오는 시기에 이 노래를 주섬주섬 찾아 듣게끔 만든다. 그래서 나에겐 그 유명한 <벚꽃엔딩>보다도 더 봄 같은 노래. 매 계절 생각나서 찾아들을 수 있는 노래가 하나쯤 있다는 것이 제법 아늑하지 않나요.


https://youtu.be/73XBFL8-9Vo



삼촌이 키우던 개와 이별을 했다. 나와 어린 시절부터 뛰어놀던 녀석이라 내가 찾아가면 늘 나보다 훨씬 큰 키로 겅중겅중 뛰며 날 맞이해줬는데. 얼마 전엔 나보다 훨씬 큰 키를 가진 사람하고도 이별을 했다. 요즘에 무슨 마가 꼈나. 이쯤되면 굿이라도 해야할 판이다. 우유부단하고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나에게 살면서 이별할 일이 점점 더 많아진다, 잔인하게도. 경험치가 쌓일수록 전보다 익숙해지고 무뎌질 법도 한데 이별은 매번 ‘첫’ 이별처럼 낯설고 공허하며 힘겹기만 하다.

불현듯 얼마 전 읽었던 장례지도사의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매일 죽음을 맞이하는 그도 매일 적응이 안 되고 힘들다고 했다. 나이 43살에 연애하다 헤어졌던 한 선배의 말도 떠오른다. “야, 이 나이 돼도 헤어지면 똑같이 힘들어.” 그렇구나. 이렇게 변하지 않는 처음들이 있구나. 그렇지만 이런 류의 처음이라면 매번 새롭게 느끼기 싫은데요. 다시는 못 느끼게 그냥 한 구석에 봉해버리면 안되나요. 끄윽끄윽.


문득 생각한다. 사람들이 첫사랑을 영원히 기억 속에 봉해버리려는 이유가 첫 ‘사랑’이 아니라 첫 ‘이별’이라 너무 아파서 그런걸까? 라고. 어릴 때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인기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가장 많은 신청자들이 찾았던 건 그들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을 보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늘 궁금했다. 저건 어떤 마음일까. 나이를 좀 먹고 나서 많이 들었던 말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지 말라는 거였다. 괜히 다시 만나서 아름답게 변질되어 있는 처음의 기억을 깨뜨리지 말라고. 정말 그럴까. 아마 어쩌면 다시 들쑤셨을 때 첫이별의 기억에 너무 마음이 아릴까봐 차마 건드리지 못한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봉해버린 아쉬움들 때문에 첫이별, 아니 첫사랑을 다룬 영화나 소설들이 그렇게나 많은 걸지도 모르지.



처음을 맞닥뜨릴 때마다 여전히 싱숭생숭, 허둥지둥 한다. 날 살아있게도, 죽어있게도 하는 처음들이지만 그래도 많은 것들이 변하고 사라지는 와중에도 변함없이 나를 두드리는 것들이 있음에 아주 작은 위안을 얻기도 한다. 아직 이런 변화를 느낄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있구나, 아직 그래도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구나. 그러니 어떠한 처음에 마음이 시끄러워지더라도 가만히 기다려 줘야지. 그럼 또 제자리로 슬그머니 돌아오겠지 마치 변함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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