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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횡설술설 Jun 04. 2023

퇴근하고 소맥 한잔 어때요

계절과 낭만이 있는 삶

오후 4시. 출근한 지 여섯 시간 정도가 지났고, 먹은 점심이 조금 소화되었고, 숨 가쁘던 일들은 어느 정도 쳐냈다. 고개를 쑥 내밀어 사무실 창문을 살핀다.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쬐던 해는 옆으로 비껴가고, 푸르른 이파리를 팔랑거리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나무들. 오늘도 날씨는 좋구나. 드릉드릉. 카톡을 켠다. 퇴근하고 소맥 한잔? 바로 답장이 온다. 야 이 날씨에 어떻게 그냥 집에 가냐. 본격 ‘번개’의 계절이다.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결혼을 하게 된다면 5월에 하고 싶었다. 단순히 날씨가 좋아서. 5월부터 시작되는 이 더운 계절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또 편애한다. 추위도 날씨도 많이 타는 나로서는 지금의 밝고 푸릇푸릇한 싱그러움이 이보다 더 소중할 수 없다. 힘이 난다. 심각해지지 않는다. 됐어, 이따 소맥이나 마셔 날씨도 좋은데. 대부분의 이슈들이 좋은 날씨로 귀결되며 조금이나마 너그러워진다. 지금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라며 당장의 순간에 잠깐이라도 더 집중하게 되고.


퇴근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한다. 편의점에 들러 상쾌환을 산다. 우리는 내일도 어김없이 출근해야 하니까. 와중에 꽃집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계절을 마음껏 표출하듯 노란색을 쨍하게 뿜어내는 해바라기와 눈이 마주친다. 안 데려갈 수가 없네. 곧 만날 친구를 떠올리며 한 다발을 만든다. 소박한 금액으로도 해바라기 한 송이와 팔랑거리는 풀떼기를 제법 자연스럽게 엮어줄 수 있어 다행이다. 아무것도 아닌 날에 뜬금없이 무언가를 건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으니까.


약속한 고깃집에 도착했다. 가게 앞 야외에 놓인, 양철 느낌의 원형 테이블 앞에 앉는다. 묻지도 않고 자연스레 소주와 맥주를 한 병씩 시켜 소맥을 만다. 얼려 나온 잔에 소주 1 맥주 2 비율로 말아, 휘휘 젓고 원샷. 목을 축인 후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늘 하루 있었던 각종 열받는 일, 현타오는 일, 답답한 일 등등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야야 그래도 오늘 날씨 진짜 좋다 그치. 이런 날씨 실컷 즐겨야 돼. 또 한잔 말아서 건배 짠.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다.


지금의 내 상태는 계절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를 보면 안다. 그래도 퇴근하고 야외에 앉아 소맥 말아먹으며 계절에 푹 빠질 여유를, 친구 손에 쥐어 줄 해바라기 한 다발 챙기는 낭만을 아직 잃지 않은 걸 보면 요즘의 내 삶이 썩 나쁘진 않은가 보다. 절대적으로 편애하는 이 계절을 충분히 불태워야 시린 겨울 내내 품고 지낼 열기를 비축해 둘 수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함께 할 친구를 불러 더위를 누린다. 올 겨울에도 그리워할 여름을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야외에 앉아 시원한 소맥을 말아 넣고, 제멋대로 춤을 춘다.


요즘처럼 쏟아지는 일들로 정신없이 바쁠 때면 해바라기 한 송이쯤 잊는 거, 사실 한순간이니까. 이럴 때일수록 태평하도록 새파란 하늘을 본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손을 흔들어대는 푸른 이파리들을 보며 내가 사랑하는 계절임을 떠올린다. 시간이 한참 흘러도 이 계절이 되면 뜨겁고 건강한 낭만을 변함없이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선물해준 꽃을 이렇게 여름 그 자체로 담아주다니,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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