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그 남자네 집]을 읽고
-본문 중에서
이사 간 지 한 달이 채 안 돼서 그 남자네가 안감 천변으로 이사 왔다. 고등학생인 그와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눴는데 이후에는 버스에서 우연히 눈길이라도 마주치는 날에는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특별한 감정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전쟁 중이었고 난 다섯 식구의 밥줄로 미군부대에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다. 퇴근하는 전차 안에서 그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마냥 반가웠다.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오간 대화 속에 파악한 그 남자는 철부지 막내아들만 바라보고 사시는 엄마를 구박하는 백수 아들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부대 앞에서 나를 기다렸고 남자가 읊어주는 시가, 남자네 집에서 듣던 음반이 암울하고 극빈하던 전시를 견디게 해 주었다. 잠시 휴전이 된 해에 그 남자와 나는 서로의 집안에 들이닥치는 사사로운 일들을 살펴야 했기에 만남은 소원해졌고 미군부대 군속으로 있던 은행원 전민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어머니가 초대한 식사 자리에서 우린 일사천리로 신혼집이 차려졌다.
은행원답게 빠듯한 월급 안에서 나는 주급으로 받아 생활을 하는데 시어머니에게는 빳빳한 새 돈으로 용돈을 드린다는 걸 알고부터는 잦은 다툼도 있었고 고된 시집살이로 권태로움이 찾아들 때쯤 그 남자의 누이에게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축구 특기로 대학에 스카우트되었는데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못 하게 되며 발작처럼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 딴사람처럼 지낸다고 했다. 그게 다 첫사랑이었던 내가 가져다준 상처 때문이라며 가끔 만나서 말벗이 되어줄 것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와 그 남자를 만나기도 했고 하루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한 날 청량리 역사에 그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감기로 며칠을 앓았고 오랜만에 들린 친정에서 소식을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마주한 그 남자의 눈은 가려져 있었고 괜찮냐고 묻는 말 대신 포갠 그의 손에서 느껴진 악력이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것 같은 슬픔에 울음이 복받쳐 병실을 나왔다. 이후로 나는 입맛이 없어졌고 임신으로 그렇게 줄줄이 넷을 낳고 한 세월이 흐르고서야 다시 만난 그 남자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티 내지 않기 위함이었는지 성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현실을 인정 안 하고 어떻게 살 수 있으려나 싶은 걱정이 앞서 나는 안 보이면 안 보이는 척도 하고 생긴 대로 살라며 악다구니를 치고는 그와 그렇게 첫사랑의 아련함은 기억 속에서 아득히 묻어두려고 했다. 그 남자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고 뒤늦게 그의 집으로 문상을 가서 그와 대면했다. 희끗희끗 해진 머리와 까만 안경을 쓰고 아들로 보이는 꼬마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생전 어머니에게 저질렀던 불효를 후회하며 흐느끼며 우는 그 남자를 나는 안아주었다. 일말의 욕망도 없는 담담한 포옹이었다.
작가의 첫사랑에 의거한 자전적 소설이었어요.
소설을 쓰는 동안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애틋하고 행복했다고 말하는 작가의 온화한 미소 속에 드리운 강인함도 이 책 속에 여실히 드러나있고요.
묵직한 돌직구도 마냥 해맑게 내던지시니 미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려지지 않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6. 25 전쟁통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토대로 그저 주어진 목숨만으로 위태위태하던 그때 한 남자의 등장으로 작가는 진흙땅에서도 꽃은 피더라며 희망을 야기해요. 코로나로 힘든 시긴인 만큼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한 추억을 복기하며 이 힘든 시기를 잘 지내보면 어떨까 하는 향연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요즘 우연찮게 집히는 책들이 다 사랑 이야기네요.
매번 에세이와 자기 계발서 책을 보았더니 사랑 이야기가 주는 오묘한 설렘이 마냥 기분 좋았던 하루하루였습니다. 남편과 만난 지 26년이 되었어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보다 '우리 그랬었지'하며 연애시절을 회상하며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게 해 준 고마운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