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범인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겁니다. 그 기회란 바로 단독행동이고요. 지금부터는 모두가 한 곳에 모여서 생활하기로 하고 부득이한 경우, 이를 테면 화장실에 가야 할 때만 딱 한 사람씩 자리를 비우기로 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른 승무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사람을 해친 살인자가 이 안에 있다면, 살인자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물론 선장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자는 동안 습격을 받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다행히 <페르세포네 호>의 개인실의 보안은 믿을 만했다.
그런데 무심코 식당을 둘러보던 태수가 CCTV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시만, CCTV가 설치된 장소들이 있잖아? 진석 씨, 어디 어디인지 알고 있어?”
“중앙통제실, 여기 식당, 그리고 동면실...”
대답하던 진석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째서 이런 간단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그럼, 동면실의 CCTV를 확인해 보면 누가 선장의 동면장치를 조작했는지 알 수 있겠네. 진석 씨도 CCTV를 확인해 본 적은 없지? 바로 확인해 보자고!”
태수가 말을 마치며 일어나자 모두들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면실을 향해 바쁘게 뛰었다. 처음으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마주하여 모두에게 활력이 솟아나는 듯했다.
“이 칩을 컴퓨터에 연결해서 함께 보죠. 중앙통제실이 가장 가까우니 거기로 갑시다.”
선장의 동면캡슐을 비추는 CCTV옆에서 칩을 분리한 진석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중앙통제실에 도착한 뒤 진석은 칩을 동하에게 건넸다. 동하가 설치되어 있던 케이블을 이용해 칩과 모니터를 연결하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이건 오늘 것이고, 이건90일 전 것이고요… 아, 여기 있네요.”
이제는 몸을 떨지 않고 있는 동하가 곧 동면에 들던 날의 동영상 기록을 찾아내자 상단에 있는 모니터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머지않아 선장이 동면실에 나타나는 모습이 보였다. 선장은 이미 승무원들이 들어간 동면캡슐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이내 자신의 동면캡슐을 열었다.
“영상으로 봐서는 선장이 돌아다니는 시점에서 우리 모두가 이미 동면캡슐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동하가 말했지만 사람들은 아무 대꾸 없이 계속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곧 선장이 열려 있는 동면캡슐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캡슐이 닫혔다. 그리고 동면실이 암전되었다.
“뭐야, 이게 끝이에요?”
나연이 입을 열자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석은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라면 선장이 동면에 든 뒤 누군가 선장의 동면장치를 조작하는 모습이 CCTV에 녹화되어 있어야 했다.
“혹시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잠든 동안 자신이 먼저 동면에서 일어나게끔 예약설정을 한 다음, 일어나서 선장의 산소공급장치를 끈 뒤 다시 동면에 든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디 한 번 볼까요?”
하지만 64배속으로 170일 동안의 CCTV를 계속 확인했음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동면실의 불은 한 번도 켜지지 않았고, 170일 뒤 불이 켜지며 모두의 동면캡슐이 열렸지만 동하가 다가와 확인할 때까지 선장은 미동도 없었다. 선장이 동면에 든 뒤 모두가 동면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 누구도 선장의 동면장치를 조작한 적이 없는 게 확실했다.
중앙통제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공간에는 기계장치들의 조그마한 작동 소리와 일동이 숨을 쉬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윽고 진석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어디선가 생각의 끈이 잘못 연결된 것 같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조금만 시간을 갖고 다 같이 함께 생각해 보시죠.”
진석의 말이 끝나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보니 태수였다.
“결국 우리 중 누군가가 선장을 해쳤을 거라는 이야기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였군. 존재하지도 않는 투명인간이 숨어 있다고 믿고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두른 격이잖아. 다들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이게 무슨 꼴이야.”
태수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석 역시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동면이 끝난 뒤 <페르세포네 호>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온 웃음소리였다. 비록 함께 임무를 진행했던 선장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나 이 중에 선장을 죽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일동은 안심할 수 있었다.
“CCTV를 확인해 보자는 태수 씨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저녁도 굶을 뻔했네.”
“그러게 말이에요.”
다시 식당에 모인 승무원들은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연우가 태수를 칭찬하자 나연도 한 마디 거들었다. 진석에게서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데서 온 실망한 기색이 아직 엿보였으나, 어쨌든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데서 온 안도감도 눈에 띄었다.
“진석 씨가 여기에 독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었잖아? 지금은 어때? 아니, 그런데 독이라고 할 만한 게 우주선 안에 있기는 있어?”
“부끄럽지만 그 당시에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우주선 안에서 독을 찾는 건 어렵겠지만, 누군가 음모를 꾸몄다면 지구에서부터라도 독을 숨겨 가져오지 않았겠어요?”
진석은 연우의 비아냥 섞인 물음에 담담하게 대답한 뒤 식사를 계속했다. 동하는 그런 진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한층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일동의 식사는 즐겁게 이어졌고, 선장의 사망사건이 있었던 이후 처음으로 모두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러면 결국 선장이 죽은 원인은 뭘까요?”
“장치에는 이상이 없었으니 프로그램 오류겠지, 뭐. 어쨌든 우리 중 누군가의 범행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니 그걸로 됐어.”
나연의 물음에 연우가 한층 밝아진 모습으로 대답했다. 동하는 그런 연우를 슬쩍 곁눈질했다. 현재 시간은 20시, <페르세포네 호>가 마르스 게이트에 도착하기까지는 15시간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