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던 시절 나는 학교에서 은따였다. 당연히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가 참으로 싫었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나는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커다란 트럭에 치어 죽어 버리면 거짓말처럼 인생을 재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교실에서의 반나절은 길기만 했고 주위를 둘러보면 마주치기 싫은 얼굴이 너무나 많았다.
가정에도 크고 작은 금전적인 문제가 겹쳐 시련의 연속이었다. 나는 아빠의 책장에서 주식투자비법이 적힌 책을 발견했던 장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 아빠를 말렸다면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졌을 테니까. 히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가정일 뿐, 우리 가족은 잘 살고 있던 자가 아파트를 팔고 반지하 월셋집으로 이사해야 했고,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 잠잠할 날이 없었다.
힘든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한 수단은 바로 게임이었다. 나는 집에만 오면 컴퓨터를 붙들고 살았고, 방학이면 밤새 게임을 하다가 아침해가 뜨면 잠이 들고, 해가 져 어둑해지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내게 엄마는 당연히 잔소리를 했지만, 그때 이미 고집이 세고 버릇이 없던 나는 그쯤은 가볍게 무시했다.
무시했던 이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자면, 게임이 그때 삶의 유일한 낙이었기 때문이다. 방에 틀어박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즐기는 게 유일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괴로운 학교생활과 냉랭한 집안 분위기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게임에게 나는 지금도 감사한다. 게임 속 세계가 바로 나의 낙원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현실에는 즐거운 일보다 힘든 일이 더 많다고 하면 지나치게 염세주의적인 발언일까? 그럴 수 있겠지만, 그래도 현실이 마냥 핑크빛이라는 발언보다는 조금 더 공감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사는 건 결코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야 하기에, 우리는 현실 속에서도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저마다의 낙원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게임 속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음악이 가득한 세상이, 또 누군가에게는 글 쓰는 데 열중할 수 있는 세상이 낙원이다. 고된 현실로부터 도망쳐, 안에 있을 때만큼은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는 공간, 때로는 자신을 얽매는 속박의 굴레를 내던지고 언제까지나 머물고도 싶은 공간을 저마다 품고 있는 것이다.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거라는 생각이 들 때, 그래도 역시 버티는 게 아니라 사는 거라는 생각을 들게 해주는 낙원이 있어 우리는 몸과 마음을 회복해 다시 현실에 충실할 수 있다. 그곳을 아무도 함부로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은, 아마도 개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로부터 비롯된 소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