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非常道 - 명상과 불교수행으로 풀어쓴 노자도덕경
1장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非常道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다."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非常道>
91장으로 이루어진 도덕경의 첫 구절이다. 그야말로 강렬하다. 도덕경 전체가 길지 않은 간결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하나의 문장에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내용이 담겨있다. 핵심 단어를 들자면 도, 이름, 그리고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언어>이다.
도道란 무엇인가? 영적인, 형이상학적인, 정신적인, 기운의 작용인, 물질적인,...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 만물의 <근원>이다. 도는 빅뱅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붓다는 우주가 팽창하다가 다시 수축하여 소멸되었다가 다시 생겨나 팽창하고 소멸하기를 끝없이 계속한다고 설하였다. 이 모든 상대적인 우주의 바탕에 도道는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아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시할 수도 없다. 근원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그 어떤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도가 어떤 것이라 정의 내리는 것도 상상하는 그 어떤 행위도 적절하지 않다. 어떤 언어도 이미지도 관념도 도道보다 하위의 것이며 도의 바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언어도단이라 하고 불립문자라 한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문자로 정의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깨달음은 도道와 유사한 차원이고 관련된 무엇이다. 공자의 저 유명한 구절인 조문도 석사가(朝聞道 夕死可),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어떤 이가 도를 얼핏 보았다면 그는 깨달음을 접한 것이다. 분명히 깨달음은 도道와 관련이 있다.
보통 깨달음을 '체험'과 연관하여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오는 오해가 '깨달음의 체험', '영성체험', '영적인 체험'과 같은 말이다. 물론 체험은 나름의 좋은 영향이 있다(나쁜 영향도 있다). 결정적으로 깨달음의 바로미터는 아니다. 체험은 가는 길의 표지가 되기는 하나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다. 길을 가다 표지판에 집착한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연 특정한 의식적인 상태나 체험이 도道라고 할 수 있을까?
붓다는 깨달음이 열반이고 해탈이라 정의하였다. 열반은 너바나 혹은 니르바나라는 글자 그대로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한다. 해탈은 오욕칠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시 태어남의 연료가 되는 탐진치가 사라진 상태이다. 그렇게 탐진치가 뿌리 뽑힌 아라한의 상태에서 남은 수명대로 살다가 육신이 죽어 반열반하면 본래의 자리, 근원인 도道의 세계와 완전히 합일하는 것이리라.
* 참고로 열반은 빨리어 원음으로 너바나이며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이다.
언어는 상대적이며 항상 관념을 낳는다. 절대적인 그 어떤 것을 도道라고 부르든 깨달음이라고 부르든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깨달음은 천차만별이다. 깨달음을 흘낏 본 체험도 깨달음이요, 엉뚱하고 신비로운 뭔가의 체험도 깨달음이라 부른다. 결국 이런 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깨달음이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자신도 속고 타인도 속인다. 무지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아닌 줄을 알면서도 탐욕 때문에 타인을 속인다.
<명가명비상명 名可名非常名>
노자는 이어서 말한다. 이름이 이름 지어질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도는 절대적인 어떤 것이지만, 이름은 상대적인 어떤 것이다. 같은 형식의 문장인데도 도가 들어가면 절대적인 것이 되고 이름이 들어가니 현상계에 속한 상대적인 것을 총칭한다. 참으로 절묘한 문장 구성이다.
이름은 '형성된 어떤 것'을 지칭한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물질적인 속성을 지녔다. 그러므로 현상계에 속하고 상대적인 것의 대표 격이다. 이름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사실은 도道를 도라고 이름 붙인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름과 달리 도道는 형성되지 않은 것이며 모든 만물의 바탕에 있으며 형성되는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있다. 도가도비상도와 명가명비상명 이후의 도덕경 1장의 나머지 구절들에서 노자는 무無와 유有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없음無은 천지의 시작을 이름 짓는 것이고, 있음有은 만물의 어머니를 이름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없음으로 그 미묘함을 보고자 하고, 영원한 있음으로 그 귀결점을 보려고 한다.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나 이름을 달리하므로 그것을 함께 현묘함이라고 일컫는다.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온갖 미묘한 것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도道 = 무無 일까? 아니다. 도는 무無도 유有도 아니다. 또한 도는 無이기도 하고 有이기도 하다. 무도 유도 모두 도로부터 나왔기에 그렇다. 또한 무도 유도 이름이다. 그러므로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고 (그렇게 이름 지었다), 있음은 만물의 시작이다. 노자는 마치 시구처럼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은유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해설본들을 낳았다. 이 번역의 필자는 항상을 뜻하는 상常을 '영원한'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常無영원한 없음'이나 '常有영원한 있음' 같은 번역은 매끄럽지 않아 보인다. 굳이 영원하다고 할만한 것은 도道 뿐일 것이기에. 어쨌든 유와 무, 둘 다 같은 곳인 도道로부터 나왔고 둘 다 이름 붙여진 것이며 형성된 것이다. 관념적으로 유와 무는 극과 극이고 완전히 다른 것이라 여기는데 같은 곳(道)에서 나왔고 이름을 달리하므로 현묘함이라 부른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그런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은 중요하다. 어떤 측면에서 봤을 때 이름은 '이르다(도달하다)'에 미음ㅁ 이 붙어 명사화된 단어다. 각 이름들은 그 개체의 고유한 지향점을 나타낸다. 이는 그것의 존재 이유이자 존재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름은 어떤 것을 형상화하고 구체화시키는 시발점으로, 분명 기운상으로 근원(최상위 차원)인 도道와 물질(최하위 차원)의 중간에 있지만 상당히 상위의 차원에 위치해있다.
* 근원(道)과 물질 사이의 간극을 잇는 중간계의 모든 것을 기氣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필자의 저서인 <비움과 치유의 근원 에너지> 참고)
명상(冥想)의 이름을 살펴보면 어두울 명冥에 생각 상想 자를 쓴다. 어두운 생각,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명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생각이나 관념 등을 어둡게(사라지게) 한다, 즉 생각 관념 등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이 명상이라는 의미다. 더 나아가 그 모든 생각과 관념에는 특히 욕심, 성냄, 어리석음 - 탐진치貪瞋癡 - 이 어우러져 있다. 무언가 욕심을 가지고 잘 되고자 더 가지고자 채우고자 하는 것이 명상의 목적이 아니다. 붓다께서 간결하고도 강력하게 설하였듯이 탐진치를 모두 뿌리 뽑으면 해탈이며, 이것이 명상의 본래 목적인 것이다.
- 明濟 전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