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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May 13. 2020

태권도는 어떻게 '내'가 되는 법을 알려주나요.

수치심을 인정하는 건, 진정한 '나'를 향한 커다란 진보입니다.


프리랜서로 삽니다 #5, "태권도"


“우리는 종종 ‘내가 된다’는 말을 들을 때, 나의 마음과 생각이 가장 ‘내가’ 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까지 가장 ‘자기다울’ 수 있다면, 그때에야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한반도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라면 어린 시절 태권도를 배우는 건 ‘필수’에 가까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양한 운동을 배우는 추세지만, 필자의 유년 시절만 해도 남자아이들 열에 아홉은 전부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태권도를 꾸준히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자기 몸을 잘 사용하고 스포츠라면 웬만큼 능숙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자주 태권도를 배우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곤 했었죠. 물론 저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도장에 다닐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여아는 발레 남아는 태권도” 의 등식이 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때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한을 풀고자, 그리고 대학원생의 스트레스를 상쇄한다는 명목 하에 태권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온 뒤로는 체육 시간을 수다 떠는 시간으로 활용하기 바빴으며, 고등학생 때는 체육 시간이 못다 한 공부를 보충하는 시간이었으니 몸 상태가 한숨 나오는 수준이었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곧 그만두고 말았죠. 도복을 입는 재미도 부끄러움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당시 저의 몸 상태는 한숨나오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태권도를 그만두고 말았죠. 도복을 입는 재미도 부끄러움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나봅니다.


    대학원을 끝마치고 다시금 태권도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도장에 갈 때마다 수치심과 그것을 가리기 위한 다양한 기제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단지 주먹 좀 지를 줄 안다고, 발차기 폼이 좀 좋다고 회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이 마음과 부딪혀 넘어가야겠다는 의지가 한 뼘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개월간 태권도를 배우며 깨달은 점은 ‘내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과 싸우지 않으면,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도장에 갔을 때, 가장 답답한 것은 제 자신이었습니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을 살까 봐 동작을 ‘있는 힘껏’ 하지 않는 나 자신 말입니다. 몸을 ‘대충’ 움직이려는 습성은 신체 곳곳에 배어 있었고,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이 습성은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어린 시절부터 ‘최선을 다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아이’의 오명을 쓰지 않고자 적정한 정도만 움직여 왔습니다. 그리고 이 습관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참 고치기 어렵더군요.



태권도를 배우며 가장 답답했던 건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을 살까봐 동작을 ‘있는 힘껏’ 하지않는 '나 자신' 이었습니다.


    문제는 부끄러운 내면과의 싸움에서 이겨 원하는 만큼 힘껏 손을 내지르고 발을 차기 시작할 때에야, 제대로 운동을 배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수치심 속에 숨어 있을 것인가, 아니면 부끄러워도  몸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기 시작할 것인가. 도장에 가는 날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습니다. 태권도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신체를 쓰도록 장려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나름 무수한 여성 리더들을 배출한 여대에서 수학하며, 젠더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막상 스포츠를 시작하니,  늘 '여자애'처럼 있기를 원하는 사회적 압력이 내 몸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를 끊임없이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역시  ‘여자애가너무 드세다거나, 너무 우왁스럽다는 등의 부정적인 피드백을 피해 가기 위하여 ‘ 내면 깊은 곳으로 묻어두고, 세상이 말하는 ‘여자 신체로 살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태권도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운동을 시작한 지금은  문제를 모른  할  없었습니다.


    

Bent out of shape - by holly stapleton

    

    특별히 주먹 찌르기나 얼굴, 몸통 막기와 같은 기본적 동작을  때면 의식하지 않았으나 '예쁘게' 움직이려는 자아가 제멋대로 튀어나와 곤혹을 치르곤 했습니다.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이 품새나 발차기 동작을 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해줄 때면, 스스로 얼마나 예쁜척을 하는지 확인하고 질겁하기도 죠.


    따라서 태권도를 하는 시간은 예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내면의 압력을 마주하고, 동시에 예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아무도 나를 거절하거나 비웃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꽤 많이 걸렸고, 요즘도 잘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들 때 무의식적으로 ‘여자애 같은’ 태도를 취하려는 스스로를 보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남자애’처럼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제가 원하는 저로 있으면 된다는 거죠�)



    

    대학원 시절 프로이트 수업을 들을 때, ‘무의식의 의식화’가 곧 정신 치료의 시작이 된다고 하셨던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무의식에 무엇이 있는지 ‘출력’이 되기 시작할 때에야 변화는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태권도는 일종의 치유이자, 내 모습 있는 그대로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나 있는 그대로 내 몸을 움직이려는 선택이 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지난한 과정을 몇 차례 더 지나고 나면, 더 편안하게 나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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